━━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지(知)와 사랑24.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19. 10:35
 
  
 지(知)와 사랑24.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골드문트는 학문에 대해 전보다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논쟁을 하던 버릇도 없어졌다. 
옛날에 나누던 대화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편 나르치스의 마음속은 최근 수습 수사로서의 수련기를 끝마쳤기 때문인지, 
또는 골드문트와의 체험 탓인지, 
은거나 금욕이나 종교적인 수련에의 욕구에 눈이 떠져 단식이나 기나긴 기도, 
빈번한 참회와 자발적인 고행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나르치스의 행위에 대해 골드문트도 이해심을 가지고 동참하기도 했다. 
기운을 회복하고 나서부터 그의 본능은 아주 예민해졌다. 
자신의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고 있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는 강한, 가끔 가슴이 답답할 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운명의 바탕이 이루어져 천진과 휴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금욕 생활은 지나가 버리고 그의 몸 속에 있는 온갖 것들이 
긴장해서 곧바로 튀어나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은 가끔씩 마음을 들뜨게 해서 연애하는 심정과도 같이 
달콤하게 밤늦게까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것이 가끔씩 그의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어머니가 그를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은 흐뭇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혹하는 목소리는 어디로 통하고 있었을까? 
확실치 않은 것 속으로, 덫 속으로, 괴로움 속으로, 
아마 죽음 속으로 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목소리는 고요함과 부드러움, 
기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나 평생으로 이어질 
수도원 생활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으리라. 
어머니의 부름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골드문트의 신앙심은 격렬한 육체적 감정과도 같아서 더욱 경건하게 자라났다. 
성모 마리아를 향한 기나긴 기도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자신을 끌어당겨 주는 감정의 물결을 넘쳐흐르게 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가끔 그 기괴하고 장엄한 꿈속에서 끝나 버렸다. 
그는 그것을 지금 마음껏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그시 눈을 감은 오관의 헛된 꿈이요, 
온갖 감각이 달라붙어 있는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 속에서는 향기를 지닌 어머니의 세계가 그를 휘어감고 있었다.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사랑의 눈매로 조용히 쳐다보기도 했고 
바다나 천국처럼 웅성거렸으며, 감미롭고 씁쓸한 맛을 느끼게도 했고, 
기갈에 허덕이는 입술과 눈매를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으로 어루만졌다. 
어머니는 고운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졌고, 
달콤하고 푸른 사랑의 눈매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행복을 약속하는 부드러운 미소, 애정이 넘치는 위안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내부에는 무언가 성스러운 베일 밑에 
모든 공포, 암울, 욕망, 불안, 죄악. 출생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숙명이 있었다.
소년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해준 몇 겹이나 되는 감각의 실에 감긴 꿈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이 눈부신 생명의 아침인 유년 시절이나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이 
그리운 과거가 매혹적으로 되살아나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는 협박, 약속, 유혹, 위험, 이런 것들이 있는 미래도 함께 떠돌고 있었다. 
이 꿈속에서는 어머니와 마돈나와 애인이 하나였으나 
그것은 후에는 때때로 끔찍스런 범죄와 하느님에 대한 모독과도 같이, 
또한 결코 보상할 수 없는 죄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또 다른 때는 그는 그 속에서 일체의 구원과 조화를 발견하기도 했다.
신비에 가득 찬 생명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둡고 측량할 수 없는 세계가, 동화적인 위험에 가득 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가시덤불의 숲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신비였다. 
어머니에게서 오고 어머니한테로 통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신비였다. 
어머니에게서 오고 어머니한테로 통해 있었다. 
어머니의 맑은 눈 속에 있는 조그맣고 어두운 흑점, 조그마한...., 
그러나 무서운 심연이었다.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유년 시절이 어머니의 꿈속에 자주 나타났다. 
끝을 모르는 깊이와 망각 속에서 수많은 추억의 꽃들이 피어 
황금빛 무늬를 그리며 풍부한 예감을 실은 향기를 풍겼다. 
그것은 유년 시절에 대한 감정, 
어쩌면 체험이나 꿈에 대한 추억들이었다. 
그는 물고기의 꿈을 꿀 때가 많았다. 
물고기들을 새까맣게, 무리를 이루어 그를 향해 헤엄쳐 왔다. 
차갑고 매끄럽게 그의 내부로 헤엄쳐 와서는 재빨리 지나갔다. 
그것들은 보다 아름다운 현실로부터 행운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심부름꾼처럼 
왔다갔다 꼬리를 치다가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소식 대신에 새로운 비밀을 남겨 주었다. 
종종 그는 헤엄치는 물고기나 날아가는 새의 꿈을 꾸었다. 
물고기와 새는 자신이 만든 창작물이었다. 
자신의 호흡처럼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눈초리나 생각처럼 그에게서 방사하고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때때로 정원에 대한 꿈을 꿀 때도 있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나무들과 엄청나게 큰 꽃들과 
깊고 검푸른 동굴이 있는 기괴한 뜰이 나타났다. 
풀 사이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들이 눈초리가 검은 빛으로 빛나고 
가지마다 커다란 뱀들이 매끄럽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덩굴마다 이슬을 머금은 커다란 딸기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달려 있었다. 
그 딸기는 꺾어들자 이내 손바닥에서 부풀어올라 피같이 따뜻한 즙을 쏟았다. 
혹은 눈을 지니고 있어 그 눈이 애타는 듯 빈틈없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