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25.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는 더듬거리며 어느 한 나무에 기대어 가지를 하나 휘어잡았다.
그러자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뒤얽힌 두툼하고 곱슬곱슬하게
달라붙어 있는 털이 보이기도 했고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그 는 자신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고
그와 같은 이름의 성자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골드문트, 즉 크리소스토무스(둘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가 꿈속에 나타나서
황금으로 말을 하자 그 말들이 작은 새떼들처럼 무리지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어떤 때는 이런 꿈도 꾸었다.
그는 커서 어른이 되었으나 어린아이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 앞에다 흙을 쌓아 놓고,
어린애처럼 그것을 가지고 조그만 말이나 황소,
혹은 조그만 남자나 여인 같은 형상을 빚고 있었다.
그는 그런 행위가 재미있었다.
동물이나 사나이들에게는 우스꽝스럽도록 성기를 크게 만들었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매우 익살맞게 보였다.
마지막에는 그 장난도 싫증이 나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자기 뒤쪽에 어떤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소리도 나지 않는 큼직한 것이 가까이 오는 느낌을 받고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놀라움과 공포와 기쁨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거기에는 조그만 점토 형상들이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그 커다란 거인들은 묵묵히 행렬을 지어 그의 곁을 지나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는 거대한 탑처럼 우뚝 솟더니 속세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보다도 꿈의 세계에서 더 많이 생활했다.
강당, 수도원의 뜰, 도서실, 침실, 예배당 등 현실의 세계는 껍질에 불과했다.
이 현실 세계는 꿈에 충만된 초현실적인 형태의 세계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얇은 껍질이나 다름없었다.
이 얇은 껍질에다 구멍 하나 뚫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분한 수업시간에 들려오는 그리스 어의 음향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예감에 충만된 것,
식물 채집을 하는 안젤름 신부의 약초 주머니 속에서 풍기는 향내의 물결,
아치형 창문의 기둥 위로 불쑥 솟은 돌기둥의 담쟁이덩굴,
그런 보잘것없는 자극들이 현실 세계의 표피를 뚫고 평화롭고 메마른 현실이 뒤편에,
저 영혼의 사납게 날뛰는 형상 세계의 심연과 격류와 은하수를 풀어헤쳐 놓기에 충분했다.
라틴 어의 머리글자 하나가 어머니의 향기로운 얼굴이 되었다.
성모를 부르는 길게 끄는 기도 소리는 천당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그리스 어의 자모는 달리는 말이 되고 똑바로 선 뱀이 되더니
그것은 몰래 꽃잎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문법책의 두꺼운 표지가 나타났다.
그는 이러한 꿈에 대해서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몇 번 나르치스에게 이 꿈의 세계에 대한 암시를 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나는 꽃잎 한 개나 길 위의 조그만 벌레 한 마리가 도서실 전체의 모든 책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내용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자나 말로써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가끔 델타라든지 오메가라든지 하는 그리스 문자의 어떤 것을 씁니다.
펜을 약간 돌리기만 해도 문자는 꼬리를 치며 고기가 되어
대뜸 세상의 크고 작은 냇물의 온갖 시원한 것이나, 눅눅한 것이나,
호메로스의 대양이나, 베드로가 걸어다닌 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혹은 그 문자는 새가 되어 꼬리를 치기도 하며,
깃을 곧추세우기도 하고 몸을 부풀리는가 하면 웃으며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나르치스 선생님, 당신은 그런 문자를 그다지 별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런 문자로 하느님은 세계를 쓰셨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
나르치스는 슬픔에 잠겨 말했다.
"그것은 마법의 문자일세.
그 문자를 가지고 어떠한 악마라도 불러낼 수가 있단 말이야.
물론 학문을 하는 데만은 적합하지 않지.
정신은 고정된 것을, 형성된 것을 사랑하는 법이니 그 기호에 신뢰심을 갖기 바라네.
또 생성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고, 가능한 것이 아닌 현실의 것을 사랑하지.
오메가라는 글자는 뱀이나 새가 되기를 용납치 않아.
정신은 자연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까닭이지.
정신은 자연을 거역하고서야 자연의 반대물로 생존할 수가 있어.
골드문트, 이제 네가 결코 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지?"
정말 그 말대로 골드문트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고 있었으면서 그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의 정신으로 향하는 학문적인 노력을 좇아 공부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빙긋 웃으며 골드문트는 계속 말했다.
"나의 정신이나 학문에 대한 태도는 아버지에 대한 태도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나타나자 나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과 나란히 선 아버지의 모습은 갑자기
조그마하고 불쾌하게 보였으며 가엾게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나는 모든 정신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모성적이 아닌 것, 모성에 적대되는 것이라고 보며
또한 그것을 어느 정도 경시하는 영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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