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26.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는 농담 비슷하게 말했으나 친구의 슬픈 얼굴을 밝게 해줄 수는 없었다.
나르치스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일종의 애무처럼 보였다.
드디어 그가 말했다.
"네가 하는 말을 잘 알겠어. 이제 논쟁이란 불필요 한 거야.
너는 눈을 떴어. 지금은 너 자신도 너와 나이 차이를,
어미의 혈통과 아버지의 혈통 사이의 차이를, 영혼과 정신과의 차이를 인식했다.
결국 이제는 수도원에 있어서의 네 생활이나
수사의 생활을 지향하는 네 노력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너의 아버지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겠지?
너의 아버지는 그것에 의해서 너의 어머니를 기억을 씻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어머니한테 복수만이라도 해보겠다는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평생 수도원에 있는 것이 너의 천명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지는 않겠지?"
골드문트는 친구의 우아하면서도 섬세하고 수척한 흰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이 금욕주의자의 손, 학자의 손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어조는 노래를 부르듯, 더듬거리며 하나하나의 음절에 오래도록 머물었다.
조금 전부터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정말 모릅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냉혹한 판단을 내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큰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이 정당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수도원에 온 지3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찾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영원히 여기 있기를 아버지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 최선책일 겁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독본 속에 있는 문자나 마찬가지로 모든 게 간단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문자조차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온갖 것이 많은 의미와 얼굴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야."
나르치스가 말했다.
"너의 행로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꼭 알게 될 거야.
너의 행로는 너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가기 시작했어.
너를 어머니에게 더욱 가깝게 해줄 거야.
그러나 너의 아버지한테도 지나치게 냉혹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너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거야?"
"아녜요. 나르치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 그렇게 할 겁니다.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왜냐하면 나는 학자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라틴 어나 그리스 어,
수학 같은 것은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에 잠겨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자꾸 내 마음속을 비치고 나를 나 자신에게
분명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까?
지금도 또 아버지에게 가고 싶으냐 안 가고 싶으냐 하는 당신의 질문이,
내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갑자기 내가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십니까?
당신은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과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듣는 순간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가서 매우 중대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혈통은 어머니 쪽이라고 말씀하신 이는 당신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마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년 시절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인간을 그다지도 잘 아십니까?
그것을 나도 배울 수는 없습니까?"
나르치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돼. 너에겐 불가능한 일이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인간도 있으나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이다.
너는 결코 학자는 될 수 없을 거야.
또 무엇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겠나?
너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단 말이야.
너에게는 다른 재능이 있어.
너는 나보다 풍부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보다 약해.
너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았어.
가끔 너는 망아지처럼 거역했고, 너를 달래는 것은 확실히 쉽지 않았지만
나는 너에게 자주 고통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지.
나는 또 너를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어.
너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 말이야.
너에게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 것도 처음에는 심한 고통을 주었지.
너는 회랑에 시체처럼 쓰러졌었어.
너는 틀림없이 이랬을 거야.
'아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마! 아니, 그만둬! 난 참을 수 없어'라고."
"그럼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자꾸 바보만 되어가고 어린아이로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너에게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또 나타나겠지.
나한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제 이걸로 끝이야, 골드문트."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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