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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27.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22. 10:28
 
  
지(知)와 사랑27.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골드문트가 소리쳤다.
  "그 때문에 우리가 친구가 된 건 아닙니다! 
짧은 도정의 길을 지난 다음, 목표에 도달하자 
간단하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은 도대체 어떤 우정입니까? 
당신은 벌써 나한테 싫증을 느끼셨나요? 
당신은 내가 싫어졌단 말씀입니까?"
나르치스는 시선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격한 동작으로 왔다갔다했다. 
그러고는 드디어 친구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섰다.
  "이 정도로 그만해 줘."
  나르치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네게 싫증이 안 났다는 것은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니."
이상하다는 듯이 나르치스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 왔다갔다했다. 
그러다가 매섭고 여윈 얼굴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골드문트를 응시한 다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야무지고 매정하게 말했다.
 "이것 봐, 골드문트! 우리들의 우정은 좋았었어. 목표가 있었고, 
네가 눈을 떴기 때문에 거기 도달했단 말이야. 이 우정이 끝나지 않길 바라네. 
그것이 자꾸만 소생되고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길 바라지. 
그러나 지금은 목표가 없어. 너의 목표는 확실치 않아. 
나는 너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어. 
네 어머니한테 물어 봐! 어머니의 모습에 물어 봐! 
네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여 봐! 그러나 나의 목표는 확실해. 
그것은 여기 수도원에 있고 매일 매시간 나를 요구하고 있단 말일세. 
내가 너의 친구가 되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만 반해도 좋다는 허락은 없어. 
나는 수사야. 맹세를 했거든. 
나는 성직을 얻기 전에 교직에서 물러나 단신과 예배로 몇 주일을 낼 거야. 
그 동안 세속적인 것에 관해서는 일체 말해선 안 돼. 물론 너하고도."
골드문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픔에 잠겨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영원히 교단에 들었다고 한다면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당신이 하게 됩니다. 
당신의 수업이 끝나고 기도도 철야도 완전히 끝맺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목표로 할 겁니까?"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나르치스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당신은 이삼 년 안에 교무주임, 아니 어쩌면 교장이 될 테지요 
수업을 개선하고 도서실을 확장하시겠군요. 
아마 책도 쓰시겠지요. 그렇잖다구요? 
그럼,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나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르치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목표? 나는 교장으로 죽을지도 모르고 
안 그러면 수도원장 혹은 사교로서 죽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어쨌든 마찬가지야. 
내가 제일 열심히 봉사드릴 수 있는 곳에, 내 성질이나 특성이나 천분이 
최상의 지반과 최대의 활동 분야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다 나를 갖다놓는 거야. 
그 밖에 다른 목표는 없어."
  "수사들에게 다른 목표는 없습니까?"
  골드문트가 물었다.
  "그래, 목표는 그걸로 충분해. 수사 신부한테는 헤브라이 어를 배우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석하는 것, 혹은 수도원의 성당을 꾸미는 것, 
혹은 들어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생활의 목표일 수 있지. 
내게 있어서는 그런 것들이 목표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수도원의 재산을 늘리려 한다거나 교단과 교회를 개혁하려거나 하지는 않아. 
나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가 이해하려는 대로 정신에 봉사하려는 것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단다. 
목표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그 대답을 음미해 보았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당신이 목표를 향하여 가는데 내가 방해라도 됐습니까?"
  "방해가 되었느냐구? 아, 골드문트, 
너보다 더 내 갈 길을 재촉해 준 사람은 없었단다. 
너는 나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맛보게 했지만 나는 그런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냐. 
나는 어려운 고비를 통해 배움을 얻고 때로는 그걸 정복했단 말이야."
 골드문트는 상대의 말을 가로채어 반 농담조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어려움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돕고 인도하시고 해방시켜 주시고 또한 
나의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셨다고 해서 그것으로 당신은 정말 정신에 봉사하셨단 말입니까? 
아마 당신은 그것으로 열의가 있고 선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수사를 수도원에서 빼앗고 정신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적을,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고, 믿고, 노력하는 적을 
하나 만들어 낸 셈이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나?"
  아주 심각하게 나르치스는 말했다.
  "이봐, 너는 아무래도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 
나는 장차 수사가 될 너를 망쳤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비범한 운명에의 길을 네 마음속에 터놓아 주었어. 
가령 내일 네가 우리들의 아름다운 수도원을 송두리째 태워 없애 버린다 하더라도, 
혹은 미치광이 같은 사교를 세상에 퍼뜨린다 하더라도, 
너를 도와서 그 길을 향하게 한 것을 난 한순간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는 다정스럽게 친구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이봐, 골드문트, 이것도 내 목표의 하나이거나 다른 어떤 것이든간에, 
강하고 가치 있는 특별한 인간을 만나서 그 사람이 이해력을 터줄 수도, 
발전시켜 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빠지기는 싫단 말일세. 
감히 나는 네게 말해 두겠어. 너와 내가 무엇이 되든, 
우리가 어떻게 되든, 네가 나를 진지하게 필요로 생각하는 순간에 
나는 결코 너를 향해 마음의 자물쇠를 채우지는 않겠어,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