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지(知)와 사랑28.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23. 08:21
 
  
지(知)와 사랑28.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것은 고별의 소리처럼 들렸다. 
사실 그것은 이별의 전주곡이었다. 
골드문트는 친구 앞에 서서 친구의 확고한 얼굴을, 목표로 향한 눈을 보고 있으려니 
두 사람은 이제 형제도 친구도 또는 그것과 유사한 아무것도 아니라 
두 사람의 길이 벌써 갈라져 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여기에 있는 그 사람, 그의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몽상가도, 운명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수사였고, 맹세도 끝내 버린 사람, 굳은 질서와 의무에 얽매인 사람, 
교단과 교회의 정신의 봉사자요, 병사였다. 
이와 반대로 자신은 여기에 있어야 할 일원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에야 분명해졌다. 
그에게는 고향도 없고 오직 미지의 세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날의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어머니는 가정을, 남편과 아들을, 공동 생활과 질서를,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고 
정처 없는 세계로 뛰쳐나가 이미 오래 전에 그 속에 빠져들어가고 말았으리라. 
어머니도 그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가지지 않았다.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일 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 나르치스는 이 모든 것을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얼마나 잘 통찰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가 말하는 소리는 얼마나 정당하였던가!
이런 일이 있고 난 며칠 뒤 나르치스는 사라져 버렸다. 
대신 다른 선생이 수업에 들어왔다. 
도서실에 있는 그의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아직 있기는 했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화랑을 지나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으며 
예배당의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중얼거리고 있는 소리를 들을 때도 간혹 있었다. 
그가 커다란 수업을 시작했다는 것도, 
단식을 하며 밤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세 번 일어난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로 옮겨지고 있었다. 
간혹 그를 볼 수가 있었지만 그에게 가까이 갈 수도, 
무엇을 함께 할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나르치스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 
책상과 식당에 있는 의자를 다시 차지하고 다시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지나간 것은 두 번 다시 그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골드문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니 수도원이나 수사의 신문, 문법이나 논리학, 연구나 정신 등이 
그에게 중요하고 또한 흥미있게 생각되었던 것은 
오직 나르치스 덕분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르치스의 모방이 그를 유혹한 것이었다. 
나르치스처럼 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물론 원장도 있었다. 
그는 원장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고귀한 모범으로도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나 교사, 학생, 침실, 식당, 학교, 수업, 예배 등 
전 수도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더 이상 여기에 남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처마끝이나 나무 밑에 걸음을 멈추어 비를 피하면서 가야 할 길도 모르는 나그네처럼, 
그는 수도원의 처마 끝에 서 있었다. 
다만 지금에야 절실히 다가오는 타향의 낯설음이 두렵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있어서의 골드문트의 생활은 망설임과 이별이 연속이었다. 
그는 중요하게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헤어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스런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 
나르치스와 다니엘 노원장과 선량하고 다정스런 안젤름 신부, 
친절한 문지기와 쾌활한 이웃 제분업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서보다도 예배당에 있는 커다란 돌로 만든 마돈나나 
현관문에 그려진 사도들과 헤어지는 것이 훨씬 괴로우리라. 
오랫동안 그는 그것들 앞에서, 회랑이 샘물 앞에서, 
세 개의 동물의 머리를 가진 기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마당 보리수에, 밤나무에 기대섰다. 
어느 때는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한 번의 추억으로 그의 가슴속에 조그만 그림책이 되리라. 
그 한복판에 있는 아직까지도 현재의 그것들이 그에게서 벗겨져 나가기 시작하며 
현실성을 잃고 유령처럼 과거의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그를 가까이에 두기를 좋아하는 안젤름 신부와 약초를 캐기도 하고, 
수도원의 물방앗간에서 하인들과 어울려 
가끔씩 포도주나 구운 물고기를 먹으며 같이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먹서먹하고 추억처럼 어슴푸레해져갔다. 
황혼이 깔린 저쪽 성당의 기도실에서는 친구인 나르치스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림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주위의 일체가 현실성을 잃고 가을의 조락과 무상의 냄새일 뿐이었다.
현실에서 그의 내부에 있는 생명, 심장의 불안스런 고동, 
그리움의 아픈 가시, 꿈의 기쁨과 불안만이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마치 그것들과 하나인 것처럼 거기에 몸을 맡겼다. 
독서나 학습을 하는 도중에 그는 자신 속으로 가라앉아 모든 것을 망각하고, 
그를 싣고 가는 내심이 흐름이나 소리에만 몸을 맡겼다. 
아직도 어두운 멜로디에, 깊은 샘물에, 
동화 같은 체험으로 충만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 소리들은 모두 다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눈은 모두 어머니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