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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30.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25. 10:52
 
  
지(知)와 사랑30.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누군가가 저쪽 숲에서 걸어왔다. 
색이 바랜 파란 치마와 검은 머리에 붉은 리본을 매고 
햇볕에 그을은 얼굴의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손에다 꽃다발을 들고 붉게 타는 듯한 
조그만 카네이션을 입에 물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인은 멀리서부터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이상스런 눈으로 살펴보다가 
그가 잠이 든 것을 알고 햇볕에 탄 맨발로 조심스레 가까이 가서 
골드문트 바로 앞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의혹은 사라졌다. 
자고 있는 예쁘장한 청년은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았고 그 여인의 마음에 썩 들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잡초가 무성한 곳에 찾아왔을까?'
 반쯤 시든 꽃을 보고 여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골드문트는 눈을 떴다. 
그의 고개는 부드럽게 옆으로 젖혀져 있었다. 
여인의 무릎에 베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잠이 덜 깨어 어리둥절해하는 눈을 낯선 갈색의 눈이 
바로 가까이에서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위험은 없다. 
따스한 갈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놀라는 그의 눈길과 마주치자 생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정다운 미소였다. 
그도 차차 입가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생긋 웃는 그의 입술 위에 그 여인의 입술이 내려왔다. 
둘은 살포시 키스를 하였다. 
그때 골드문트는 문득 마을에서의 그날 저녁과 머리를 땋은 조그만 처녀를 생각했다. 
그러나 키스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여인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고 자꾸 비벼대고 유혹하더니, 
나중에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그의 입술로 덤벼들었다. 
그의 피에 달려들어 마음속 밑바닥까지 눈을 뜨게 했다. 
길게 이어진 침묵의 유희 속에서 갈색의 여인은 소년에게 천천히 타이르듯 
그가 찾아내고 발견하는 대로 몸을 맡겨버리고, 
그를 불타오르게 하는가 하면 정열의 불을 식혀 주기도 했다. 
매혹적이며 짧은 사랑의 행복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황금빛으로 붉게 탔다가는 기울어지며 꺼져 버렸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여인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누워 있었다. 
한마디의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여인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지며 
그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눈을 떴다.
  "이봐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나는 리제예요."
  여인이 말했다.
  "리제라고?"
  그는 음미하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리제, 당신은 예쁘군요."
  여인은 입술을 그의 귀에 갖다대고 소곤거렸다.
  "당신, 처음이었지요? 이전에 사랑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 뒤 들판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벌써 해가 기울었어. 이젠 돌아가야지."
  "어디로요?"
  "수도원으로. 안젤름 신부한테로."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요? 당신 그곳에서 살아요? 내 곁에 더 있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러고 싶어."
  "그럼 가지 말아요!"
  "아니, 그건 안돼. 약초를 더 캐야 하는걸."
  "당신은 수도원에 있나요?"
  "응, 난 학생이야. 하지만 이젠 거기서 떠날 거야. 당신한테 가도 될까, 리제? 
대체 당신 집이 어디야?"
  "내 귀여운 사람, 집은 없어요. 나한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요? ... 
"그래" 
'골드문트'라구요? 키스해 줘요. 그럼 보내줄게요."
  "정말 당신 집이 없어? 그럼 어디서 자지?"
  "괜찮다면 숲이나 건초더미 위에서 나와 함께 지낼 수도 있어요. 
오늘밤에 올 수 있어요?"
  "오고 말고. 그런데 어디서 만나지?"
  "부엉이 소리 낼 수 있어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 걸."
  "그럼 한번 해보세요."
  그는 곧 부엉이 소리를 흉내냈고 여인은 킬킬대며 흐뭇해했다.
  "그럼, 오늘밤 수도원에서 나와 부엉이 소리를 내요. 
난 근처에 있을 테니. 귀여운 아기, 골드문트.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응, 내 마음에 꼭 들어. 리제, 꼭 나올게. 안녕, 지금은 가봐야겠어."
  재촉해서 말을 달려 골드문트는 해질 무렵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안젤름 신부가 매우 분주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수사 한 사람이 맨발로 개울을 거닐다가 유리 조각에 발이 찔렸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르치스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식당에서 일하는 수사 한 사람을 붙들고 나르치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금식하는 중이어서 식당에 오지 않거니와 
밤에 예배를 보기 위해 지금쯤은 잠을 자고 있을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골드문트는 달려갔다. 
기나긴 수양 기간 동안에 나르치스의 침실은 수도원 안쪽의 고해실 중 하나를 사용했다. 
골드문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