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31.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좁다란 나무 침대에 나르치스가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모습은 마치 송장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뜬 채 아무 말도 없이 골드문트를 쳐다보았다.
비난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 어떤 다른 시대와 세계 안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친구를 알아내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나르치스!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방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나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나르치스는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절실한 일인가?"
나르치스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과 작별을 해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네가 온 것을 헛되이 할 수는 없지.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15분쯤은 시간이 있어. 밤기도가 시작될 시간이거든."
그는 수척한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위에 앉았다.
골드문트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골드문트는 잘못을 자각하며 말했다.
그 골방,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며칠 밤을 새워 야위고 지친 얼굴, 방심하고 있는 듯한 시선,
나르치스의 그 모든 표정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가를 역력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어. 나를 염려할 것은 없다.
나는 아무 곳도 아픈 데는 없으니까. 너는 방금 작별을 고하러 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여기를 떠나겠다는 말인가?"
"오늘 떠날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말았어요."
"아버지한테서 무슨 소식이라도 왔는가?"
"아니요. 아버지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내게 왔습니다.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떠납니다.
당신에게 부끄러움을 끼쳐 죄송합니다만 나는 여기를 떠납니다."
나르치스는 그의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넓은 법의의 소맷자락에서 유령처럼 가느다랗게 내밀어져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필요한 것만 말해. 간단히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신상에 일어난 것을 내가 말해 볼까?"
이렇게 말했을 때 그의 준엄하고 지친 얼굴에서 전혀 느낄 수가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그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골드문트는 간청하듯 말했다.
"너는 사랑에 빠진 거야. 여자를 알았고."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네 표정에 나타나 있어.
너의 모습이 사람들이 사랑할 때 갖는 도취된 특징을 모두 풍기고 있어.
그러니 이제 말해 보렴."
골드문트는 망설이면서 친구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르치스, 하지만 이번만은 틀렸습니다.
이건 전혀 다릅니다. 나는 들판에 나가 따스한 햇살 아래서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내 머리는 아름다운 어느 여인의 무릎 위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이제야 나를 데리고 왔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을 어머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짙은 갈색눈에 검은 머리였으나
어머니는 나처럼 금발이었기 때문에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부름이었으며
어머니로부터 온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꿈속에서 찾아온 것처럼 아름다운 한 여인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나의 머리를 그녀의 무릎 위에 얹고
꽃 같은 미소를 띠며 나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맨 처음 키스를 할 때,
나는 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녹아 내리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모든 그리움, 모든 꿈, 모든 달콤한 불안,
내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모든 비밀, 그 모든 것이 눈뜨고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마법에 걸려 모든 것이 의미를 얻었습니다.
그 여인이 나에게 여자의 본질과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불과 30분 동안에 몇 해 만큼이나 나를 성숙하게 했습니다.
이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수도원에 단 하루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어두워지면 곧 떠나겠습니다."
나르치스는 조용히 끝까지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인 일이었군.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대로야.
나는 자주 너를 생각할 것이다. 너는 내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친구여,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될 수 있으면 나를 완전히 못된 놈으로 단정해 버리지 않도록
원장님께 잘 말씀해 주십시오.
이 수도원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래도 그분과 당신뿐이었습니다."
"알았네.... 또 다른 소원은?"
"네,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훗날 내 생각이 나거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무엇 때문에 골드문트?"
"당신의 우정, 당신의 인내, 그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서도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도.
또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내가 자네를 붙잡겠는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너도 알 텐데.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 작정이지, 골드문트? 목적지가 있는 거야?
그 여인한테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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