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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32.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27. 09:23
 
  
지(知)와 사랑32.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네, 그 여인과 같이 가겠습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 여인은 낯선 사람이며 유랑인입니다. 보기에도 집시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나 골드문트, 그 여인과 동행하는 것은 극히 짧은 동안일는지 모른다. 
너무 그 여인을 의지해서는 안 될 거야. 
그 여자에게는 친척이나 남편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들이 너를 어떻게 맞이해 줄지 누가 알겠니?"
  골드문트는 그에게 기댔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압니다. 
제겐 목표가 없다고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에게 가기는 합니다만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언가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기대 앉았다. 
슬픔에 잠겼으나 변함 없는 우정을 가진 감정 속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눈이 멀어 아무것도 예견치 못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오늘 실로 기이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기꺼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과 만족에 가득 차서 떠나는 건 아닙니다. 
이 행로는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름답기도 할 것입니다. 
한 여인의 사람이 되고, 사랑을 준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이야기가 어리석게 들리더라도 비웃진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에게 몸을 맡기고 그것을 완전히 껴안음과 동시에 
그 여인에게서 포옹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반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결코 조롱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인생에의 행로, 인생 의미에의 행로입니다. 
아, 나르치스, 나는 당신한테서 떠나야만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르치스, 
당신이 나를 위해 잠자는 것을 조금 희생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나를 잊지는 않겠지요?"
  "서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자!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겠다. 
너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어.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을 게. 형편이 안 좋을 때는 내게 오든가, 나를 부르든가 해. 
잘 가거라, 골드문트. 하느님이 너와 함께 하기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골드문트는 그를 껴안았다. 
그는 친구가 애무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키스는 하지 않고 
다만 두 손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밤이 되었다. 나르치스는 골방을 나와서 문을 닫고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포장된 돌 위에 신발이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골드문트는 다정스런 시선으로 수척해진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드디어 복도 끝에 이르러 어둠을 뚫고 그림자같이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수련과 의무와 덕성에 빨려들어 재촉을 받듯 사라졌다. 
아, 모든 것이 얼마나 이상 야릇하고, 끝없이 기묘하고, 혼란 속에 있는 것일까! 
바로 명상에 잠겨 단식과 철야에 온몸이 초췌해진 친구가 
청춘과 마음과 감각을 십자가에 걸고 희생으로 복종의 가장 엄격한 단련을 받아서 
온 마음을 정신에 봉사드려, 온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어 있는 이 시간에, 
용솟음쳐 흐르는 가슴을 안고 꽃봉오리 움트는 사랑에 취하여 그 친구를 찾아오다니, 
이것은 또 얼마나 기묘하고 놀라운 사실인가! 
친구는 여위어 지치고 창백한 얼굴에 
앙상한 뼈마디만 남은 손을 하고 드러누워 있어 보기에도 시체 같았다. 
그렇지만 이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다정스레 친구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여인의 체취를 몸에 지닌 연애하는 벗에게 귀를 기울이고 
참회와 수양 사이의 얼마 안 되는 휴식 시간을 희생하여 주었다! 
이런 종류의 사랑, 이런 자아를 버린 완전히 정신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맛본 사랑, 
감각의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던 사랑의 유희, 
흠뻑 취한 유희와는 얼마나 판이한 사랑이었을까! 
그렇지만 둘 다 사랑이었다. 
아, 나르치스는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거듭거듭 두 사람이 서로 닮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 나서, 
지금 나르치스는 제단 앞에서 지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성찰의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밤에는 두 시간 이상 쉬는 것도, 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골드문트는 리제를 만나 
달콤하고 동물적인 행위를 반복하기 위해 그 여인과 달아나 버렸다
나르치스라면 거기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말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아니었다. 
이 아름답고도 소름이 끼치는 수수께끼와 혼란을 캐내고, 
거기에 대해서 중대한 사실을 이야기할 의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막연하고 어리석은 골드문트의 행로를 걸어나가는 이외의 의무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름답고 따뜻한 젊은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밤의 성당에서 기도드리고 있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 이외의 의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