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33.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런 감정으로 안마당의 보리수를 지나
물방앗간으로 이르는 출구를 찾았을 때, 그는 '마을에 가기' 위해
콘라트와 함께 똑같은 사잇길을 지나서 수도원을 빠져나온
그날 밤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그 당시 그는 얼마나 흥분된 가슴을 두근거리며 금지된 소풍에 나섰던가.
그런데 지금은 영원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훨씬 더 엄격하게 금지되고, 위험한 길을 가면서도 두려움도 없이
문지기도 원장도 선생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지금은 개울에 널빤지가 놓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건너가야 했다.
그는 옷을 벗어서 건너편으로 던진 다음
가슴까지 차올라 깊숙하고도 세차게 흘러가는 차가운 개울을 건넜다.
둑을 건너 옷을 입는 동안 그의 사념은 다시 나르치스에게로 향했다.
지금 그는 나르치스가 예견하고 인도했던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자 수치스런 감정이 들었다.
지혜롭고 약간 조소 어린 나르치스의 모습이 똑똑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주 어리석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것을 들어준 나르치스,
지나간 날 중요한 시간에 고통 가운데서 그의 눈을 뜨게 해준 나르치스,
그가 들려준 몇 마디 말이 분명하게 들렸다.
'너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을 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너는 소녀의 꿈을 꾸지만, 나는 소년의 꿈을 꾼다.'
그의 가슴은 잠시 얼어붙을 듯이 죄어들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홀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뒤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형식상의 고향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역시 오래 살아 정든 집이었다.
동시에 그는 또 다른 것을,
나르치스가 이제는 그를 충고하거나 우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도자나 선각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그는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오직 혼자서 행로를 발견한 나라로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 기뻤다.
독립하지 않았던 시절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 그는 어린 아이도, 학생도 아니었다.
이제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별을 고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어려운 고비였던가!
친구가 건너편 성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줄 수가 없고,
도와줄 수도 없고,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리고 이제부터 기나긴 세월을 어쩌면 영원히 그와 헤어져서 살고
그에 관한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도,
그의 고귀한 눈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는 체념한 듯이 자갈길을 더듬어 나갔다.
수도원의 벽에서 백여 발짝쯤 걸어간 후
그는 멈추어 서서 숨을 가다듬고 부엉이 소리를 냈다.
이어 똑같은 소리가 저편 개울 밑에서 들렸다.
'짐승들처럼 소리를 지르는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사랑의 유희를 하던 오후의 한때를 더듬어 보았다.
그와 리제 사이에는 애무가 끝나는 마지막에야
겨우 몇 마디 오고 갔을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반면에 나르치스와는 얼마나 기나긴 대화가 오고갔던가!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엉이 소리로 꾀어 내는,
언어가 아무런 뜻을 갖지 않는 세계로 들어왔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오늘 언어와 사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구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리제에 대해서, 언어는 필요 없는 맹목적인 감정과 탐색에 대해서,
한숨을 쉬며 서로가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에 대한 욕구를 가질 뿐이었다.
리제는 그곳에 있었다.
그 여자는 숲에서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두 손을 벌렸다.
애정에 넘쳐 두 손을 더듬으며
여인의 머리와 머리카락, 목, 뺨, 날씬한 몸과 탄력 있는 허리를 안았다.
한 팔로 여자를 안은 채,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여자는 어두운 숲을 잘도 해치고 나갔다.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는 데 진땀이 흘렀다.
여자는 여우나 담비처럼 밤눈이 밝은지 아무것에도 부딪치거나 걸리지 않고 걸어갔다.
그는 언어, 사고도 없이 어둠 속으로 숲속으로,
신비가 가득 찬 나라로 이끌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생각이라는 것조차 망각해 버렸다.
떠나 온 수도원도, 나르치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쿠션처럼 부드러운 이끼 위를,
때로는 광대뼈같이 불거진 딱딱한 뿌리가 튀어나온 어두운 숲길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달려갔다.
아주 캄캄했다가 때로는 높다란 곳에 매달린 잎새 사이로 밝은 하늘이 보였다.
관목들에 얼굴을 부딪히기도 하고 나무딸기의 덩굴이 옷에 걸려 그를 붙잡아 놓기도 했다.
어디든 리제가 알고 있는 길이어서 어려움없이 길이 열렸다.
멈추어 서거나 주춤거릴 때는 거의 없었다.
한참 후에 두 사람은 듬성듬성한 솔밭에 이르렀다.
희뿌연 밤하늘이 열리고 숲이 끝나며 초원으로 뒤덮인 골짜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달콤한 건초 냄새가 났다.
그들은 소리없이 흘러가는 개울을 건너갔다.
활짝 트인 이곳은 숲속보다 한층 더 고요했다.
관목들의 속삭임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고목들의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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