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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34.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29. 10:43
 
  
 지(知)와 사랑34.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커다란 건초더미 옆에 리제는 멈추었다.
  "여기서 쉬어요"
두 사람은 건초에 주저앉아서 우선 숨을 내쉬고 휴식을 즐겼다. 
얼마간의 피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팔과 다리를 마음껏 뻗고 이 밤의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차츰 이마의 땀이 마르고 얼굴이 식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골드문트는 흐뭇한 피로 속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 당겼다 폈다했다. 
그러면서 깊은 심호흡으로 밤과 건초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다. 
과거도 생각하지 않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애인의 향기와 따스함에 서서히 이끌리고 매혹 당할 뿐이었다. 
때때로 여자의 애무에 답하기도 하며, 
그녀가 차츰 열이 오르기 시작하여 자꾸 몸을 밀어붙이자 
그의 몸은 서서히 녹아 내렸다. 
언어도 사고도 필요 없었다. 
그는 중요하고 아름다운 온갖 것을, 
여자의 싱싱하고 포동포동한 힘과 단순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그 몸이 뜨거워져서 욕정으로 차오르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또 이번에는 그 여자가 첫번째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받고 싶어하고 있는 것을, 
이번에는 그를 유혹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격과 욕망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거센 물결이 흐르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소리도 없이 서서히 자라나는 불길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서, 
두 사람의 아늑한 침상을 침묵의 온 밤이 
호흡하고 타오르는 중심으로 만드는 것을 느끼곤 행복에 잠겼다.
리제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히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자 
갑자기 그녀의 눈매와 이마가 부드러운 빛 속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놀라움에 눈을 번쩍 뜨고, 그 빛이 보얗게 비치다가 급속도로 강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랗게 줄을 지어 있는 어두운 숲 기슭 위에 달이 떠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빛이 리제의 이마와 볼 위에, 
동그스름한 하얀 목 위에 흐르는 것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나지막이 꿈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리제는 듯 미소로 답했고 
그는 여자의 몸을 반쯤 일으켜 조심스럽게 여자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리제는 차디찬 달빛 속에 어깨와 가슴이 노출되어 빛날 때까지 옷을 벗었다. 
그는 도취되어 눈과 입술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여자는 마술에 걸린 듯 눈길을 아래로 향한 채 엄숙한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이 순간에 처음으로 발견되기라도 한 듯이.
 7. 들판이 서늘해지고 달이 시시 각각으로 중천을 향하는 동안, 
두 연인은 사랑의 유희 속으로 빠져들어가 
함께 누워 달빛이 부드럽게 비치고 있는 침상에서 쉬고 있었다. 
눈을 뜨면 또다시 마주 누웠다. 
서로 불꽃을 튀기며 부둥켜안았다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마지막 포옹을 하고 나서는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리제는 건초에 깊이 몸을 파묻고 이따금 소리내어 숨을 쉬었다. 
골드문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똑바로 드러누워 희멀건 달과 하늘을 언제까지나 쳐다보았다. 
그들은 크나큰 슬픔에 휩싸여 거기서 도망치려 다시 잠에 빠졌다. 
깊은 잠을 탐욕스럽게 맞아들였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영원히 깨어 있어야만 하는 선고를 받고, 
이 세상의 온갖 잠이란 잠을 모두 자신들의 내부로 끌어넣기라도 할 듯이 깊이 잠들었다.
골드문트가 눈을 떴을 때 리제는 그 검은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겨우 반쯤 뜬 눈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 보았다.
  "벌써 일어났어?"
  골드문트가 먼저 말했다.
  여자는 깜짝 놀란 듯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젠 가봐야겠어요."
  하고 여자는 당황하고 속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깨우기 싫었어요
  "벌써 일어났는 걸. 우리는 이제 길을 나서야겠지? 
  하기야 우리는 갈곳도 없는 처지니까."
  "나야 그렇지만."
  리제가 말했다.
  "당신은 수도원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잖아요?"
  "이제는 수도원 같은 곳에 가지 않아. 나도 당신과 같아. 
아주 외로운 몸이고 목표도 없거든. 당신하고 같이 가고 싶어. 정말이야."
  여인은 돌아보았다.
  "골드문트, 당신은 나와 같이 갈 수가 없어요. 
이제 난 남편에게 돌아가야 해요. 
밤에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남편한테 두들겨맞을 지도 몰라요. 
길을 잃었다고 말하겠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이미 
이런 예상을 하고 말했던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계산이 틀렸어."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살게 되리라 믿었어. 
그건 그렇고, 당신은 정말로 나를 깨우지도 않고 도망칠 작정이었나?"
 "당신이 화를 내며 나를 때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에게 매맞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당신한테는 맞기가 싫었어요."
그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리제,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아.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당신에게 매질하는 남편 대신 차라리 나와 같이 떠나는 게 어떻겠어?"
여자는 얼른 손을 뿌리쳤다.
  "안 돼요, 안돼!"
여자는 거의 울부짖든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