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44.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나는 어젯밤 당신이 발을 만진 여자하고는 달라요.
당신은 벌써 그런 여자한테 익숙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 여자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도 거울은 있어요."
"리디아, 당신은 당신의 이마를 거울에 비추어 본 적이 있기나 한가요?
그리고 어깨를, 손톱을, 무릎을.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잘 어울려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요?"
"어쩌면 그런 말을! 당신 속셈을 알 것 같아요.
당신은 바람둥이여서 나한테 허영심을 불어넣으려 하는 거예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한테 허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겠어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나는 거기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당신은 억지로 그 말을 하도록 하지만 나는 말을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잘 내 마음을 나타낼 수가 있어요!
말로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배워 줄 수가 없어요."
"도대체 당신한테서 뭘 배우라는 거죠?"
"리디아, 나는 당신한테서, 당신은 나한테서 서로 배우는 거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원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을 신부로 맞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려고 하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심지어 키스조차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웃을 거요."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한테 키스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거군요? 학사님."
그는 리디아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리디아의 말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지만
그녀의 얼마간 과격하면서 진심이 아닌 영리한 말솜씨 뒤에는
소녀다운 정욕에 휩싸여 몸을 떨면서
그것을 거역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리디아에게 싱긋 웃어 주며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자신의 시선으로 감싸안았다.
리디아가 저항을 하면서도 긴장이 풀릴 때
그는 서서히 리디아의 얼굴에 그의 얼굴을 갖다대었다.
드디어 입술이 맞부딪쳤다.
그는 가만히 리다아의 입술을 스쳤다.
리다아의 입술은 어린아이의 키스처럼 가볍게 응답했으나
그가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놀라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 입술을 살며시 열었다.
그는 부드럽게 사랑을 구하면서 여자의 입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올 때까지 쫓아갔다.
그리하여 별다른 어려움없이 키스를 주고 받는 방법을 가르쳤다.
마침내 리디아는 힘없이 그의 어깨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짙은 금발의 냄새를 맡으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 시절에
집시 여인 리제를 통해 그 비밀을 깨달았던 일이 떠올랐다.
리제의 머리카락은 얼마나 까맣고, 그 살결은 얼마나 매끄러웠던가!
햇볕은 내리쬐고 시든 고추나물은 또 얼마나 향기를 풍겼던가!
그것은 벌써 얼마나 아득한 옛날 일이고 얼마나 멀리에서 반짝여 온 것이었을까!
이다지도 빨리, 꽃도 피기 전에 온갖 것들은 시들고 마는 것이었다!
리디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나 그 표정은 조금과 사뭇 달랐다.
리디아의 열망하는 듯한 커다란 눈이 그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해줘요, 골드문트 너무 오래 당신 곁에 있었어요.
아, 사랑하는 내 사람!"
그들은 매일 비밀의 시간을 찾아내었고
골드문트는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처녀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신비로운 행복에 잠기도록 했고 그를 감동시켰다.
리디아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의 두 손을 붙들고 그의 눈을 쳐다보기만 하다가
어린아이처럼 살짝 입을 맞추고는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싫증이 날 정도로 키스를 하지만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언제는 수줍어하면서 그를 기쁘게 해줄 생각으로 유방을 보여 주기도 했는데
그가 거기에다 키스를 하자 리디아는 목까지 새빨개지며 조심스럽게 옷 속으로 감추었다.
그들의 대화는 처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어 스스로 그 방법을 터득해 갔다.
리디아는 자신의 유년 시절의 꿈과 유희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으며
또 그가 리디아와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는 슬픔에 잠겼고
그들의 사랑은 슬픔의 배일로 장식되어갔다.
골드문트는 처음으로 한 여자에게 단순한 욕정만이 아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리디아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고 명랑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두 눈 속에는 슬픔만이 가득 차 있어요.
마치 이 세상에는 행복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것도 사랑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곁에 오랫동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의 눈처럼 아름다운 눈은 없겠지만 당신의 눈만큼 슬픈 눈도 없을 거예요.
그것은 당신이 고향을 가지지 않는 탓인가 봐요.
당신은 숲에서 나와 나한테 왔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이끼 위에서 잠자는 방랑을 계속하겠죠.
하지만 나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당신이 떠나더라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동생과 함께 방에 앉아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창문을 가질 테지만, 절대로 고향은 가질 수 없을 거예요."
그는 리디아의 이야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끔씩 미소나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말로써 위안을 주지 않고 단지 가슴에다 여자의 머리를 안고, 어
린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아무 뜻도 없는 소리를 나직이 읊조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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