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43.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애처로워 보였으므로
그녀의 고통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도 무엇을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심정이었다.
그녀가 뭐라든 그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보다 그 눈을 믿었다.
리디아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 대답이 없자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거듭 말했다.
"정말로 당신은 수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에요!"
"용서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지금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수치를 모르느냐고 당신은 묻고 있지만 물론 나는 수치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수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법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리디아는 아무 말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주저앉은 채 꼭 다문 입술로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까마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이런 상황에 놓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리디아의 무릎에 얼굴을 댔다.
그 감촉은 그에게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댈 수가 없어 이내 슬퍼졌다.
리디아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아무 말도 없이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거북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러나 리디아의 무릎은 그가 비벼대는 따스한 볼을 다정스레 받아 주었다.
그는 가만히 무릎에 기댄 채 서서히 그 고귀하고 기다란 형태를 자신 속에 받아들였다.
품위 있고 맵시 있는 이 무릎이 리디아의 기다랗고 아름답고 팽팽한 반월형 손톱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생각하고 골드문트는 환희와 감동을 맛보았다.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무릎에 얼굴을 비벼대면서 볼과 입술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망설이는 듯한 리디아의 손이 나는 새와 같이 사뿐하게 그의 머리카락 위에 얹혀졌다.
부드러운 손이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길고 날씬한 손가락과 곱게 반월형을 이룬 장미빛 볼록한 손톱,
그는 리디아의 손을 자기 자신의 손인 양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리디아의 보드라운 손가락이 수줍게 그의 고수머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디아의 말은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러웠으나 그것은 사랑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는 얼굴을 리디아의 손바닥에 대고 비비며
목덜미와 뺨으로 그녀를 느꼈다.
리디아가 말했다.
"이제 갈 때가 됐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애정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손가락에 가만가만 입을 맞추었다.
"제발, 일어나요. 돌아가야 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탔다.
골드문트의 가슴에는 행복이 물결치고 있었다.
리디아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부드러운가!
아직 한 번도 리디아와 키스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리디아로 가득 충만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질풍같이 달렸다.
저택 입구 근처에 와서야 비로소 리디아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둘이 함께 들어가서는 안 돼요. 참 어리석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말에서 내리고 마부가 달려나오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되어서야
리디아는 얼른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당신, 어젯밤에 그 여자한테 갔는지 안 갔는지 말해요!"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면서 안장을 풀기 시작했다.
오후에 아버지가 외출하자마자 리디아는 그의 서재에 나타났다.
"정말이에요?"
리디아는 정열적인 어조로 재빨리 물었다.
그 말의 뜻은 그는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추잡한 짓을 해서 그 여자를 홀딱 반하게 했어요?"
"사실은 당신한테 반했던 거예요."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발보다 당신의 발을 간절히 더 만지고 싶었오.
하지만 당신의 발은 테이블 밑에서 한 번도 나한테 오지 않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 주지도 않았어요."
"골드문트, 정말 내가 좋아요?"
"물론이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모르겠소, 리디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오.
어떻게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소.
당신의 모습을 보고,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손이 나의 머리를 만져 줄 때 나는 행복하오. 키스를 하게 되면 기쁠 거요."
"약혼자한테만 키스할 수 있어요, 골드문트. 그렇게 생각지 않나요?"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소.
당신이 내 약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래요. 당신이 내 남편이 될 수도 없고 항상 내 옆에만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없어요.
당신은 나를 유혹할 수 있다고 믿었나요?"
"나는 그런 걸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생각해 본 적도 없소.
리디아, 나는 당신이 키스를 받고 싶다는.... 우리는 너무 이야기가 많군요.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죠?"
"오늘 아침에 당신은 반대의 말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반대의 행동을 했구요."
"내가? 그것은 무슨 뜻이죠?"
"처음에 당신은 내가 오는 것을 보자 나를 피해 달아났소.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 다음에 당신은 울고 말았소. 이것 또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소.
또 내가 당신의 무릎 위에 머리를 비볐을 때 당신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소.
그런데 그것이 이젠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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