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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41. - Herman Hesse.

Joyfule 2012. 10. 8. 11:04
 
  
지(知)와 사랑41.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가을의 유랑자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골드문트는 알고 있었다. 
새로운 옷차림도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오랫동안 두 자매와 한집안에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참 하녀는 옷장에서 고운 무늬의 갈색 천을 찾아 
골드문트의 의복과 모자를 만들어야만 했다. 
기사는 까만 색깔로 학생복같이 만드는 게 좋다고 고집했으나 
골드문트는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서 반은 관리인, 반은 사냥꾼 같은 멋진 옷이 만들어졌고 
그 옷은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글쓰기도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쓴 것을 그들은 함께 훑어나갔다. 
골드문트는 정확치 못하고 불충분한 많은 단어를 정정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기사의 짧고 서툰 문장들을 분명한 구조와 세련된 표현을 사용해 
아름답고 완전한 문장으로 고쳤다. 
기사는 무척 만족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일로 매일 최소한 두 시간씩 바쁘게 보냈다.
그 고성에서--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견고한 농부의 넓은 저택이었지만--
골드문트는 여러 가지 소일거리를 발견했다. 
그는 사냥을 하기도 하고, 사냥꾼 힌리히를 따라다니며 활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개와 친구가 되었으며, 말도 마음껏 탈 수가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별로 없었다. 
이야기 상대는 대개 개나 말, 혹은 힌리히나 고참 하녀 레아 였는데, 
이 여자는 남자 목소리를 내며 농담을 무척 잘 하고 호들갑스레 웃는 살찐 노파였다. 
개를 돌보는 소년이나 양을 지키는 목동이 이야기 상대가 될 때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방앗간의 부인과 밀애를 즐기기도 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자중하고 순진한 숫총각 행세를 했다.
또한 그는 기사의 딸들에게 완전히 매혹 당했다.
동생 쪽이 더 아름다웠으나 새침데기여서 골드문트와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극도의 조심성과 은근한 태도로 두 처녀에게 접근해 갔는데, 
처녀들은 그의 접근을 그칠 줄 모르는 구애라고 느끼고 있었다. 
동생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니 리디아는 그에 대해서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별스런 학자라도 대하듯이 반은 존경으로, 반은 조롱으로 
여러 가지 흥미있는 질문을 하며 수도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럴 때 그녀는 언제나 귀부인 같은 우월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는 리디아를 대할 때는 귀부인과 같이, 
율리에를 대할 때는 어린 수녀를 대하듯이 했다. 
저녁 식사 후 그의 이야기로 평상시보다 오랜 시간 두 딸을 식탁에 붙잡아 두거나, 
정원에서 리디아가 그에게 말을 걸 때면 
그는 만족해하며 그것이 일종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을, 저택 안마당에 있는 높다란 물푸레나무의 잎은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고 
정원에는 들국화와 장미꽃이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이 왔다. 
이웃 영주와 그의 부인이었다. 
그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에 이끌리어 평소에는 안 하던 먼 소풍을 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며 하룻밤 숙박을 청했다. 
기사는 매우 공손히 그들을 맞았다. 
자연히 골드문트의 침대는 객실에서 서재로 옮겨지고 그 방은 손님을 위해 꾸며졌다. 
몇 마리의 닭과 물방앗간에서 얻은 고기로 요리를 하느라 법석이었다. 
골드문트는 즐거이 손님 접대에 참석해 낯선 귀부인이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귀부인의 목소리나 눈매에 의해서 그는 부인의 호감과 탐욕을 눈치챘으나 
반면에 리디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와 귀부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아채곤 더욱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저녁 만찬이 시작될 때 귀부인의 발이 테이블 밑에서 골드문트의 발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 희롱과 더불어 그 이상으로, 리디아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 희롱을 관찰하고 있는 침묵의 음울한 긴장이 그를 매혹시켰다. 
나중에 그는 일부러 나이프를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으면서 귀부인의 허벅지와 발목을 애무해 주었다. 
그러자 리디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더니 입술을 깨무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수도원의 일화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손님인 귀부인은 이야기보다는 그의 구애의 소리를 마음속으로 애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기사는 호의를 가지고, 이웃에 사는 영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젊은이 속에 불붙고 있는 불길에 감동되고 말았다. 
리디아는 그가 이토록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만발한 꽃과 같았다. 
허공에는 기쁨이 춤추고 눈은 빛나며 목소리는 행복을 노래하고 사랑을 애원을 하고 있었다. 
세 여자는 그것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을 느꼈다. 
어린 율리에는 격렬한 저항감으로, 영주의 부인은 황홀한 만족감으로, 
리디아는 괴롭게 파동치는 가슴으로, 마음속에서의 동경과 가냘픈 저항, 
격렬한 질투가 뒤얽혀서 급기야는 그녀의 얼굴은 열로 들떴고 눈동자는 불타기 시작했다. 
골드문트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구애에 대한 은밀한 대답으로 되돌아왔으며 마치 새처럼, 
몸을 맡기고 저항하고 서로 싸우는 사랑의 사념들이 그를 에워싸고 날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