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42.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식사가 끝난 뒤 율리에는 들어가 버렸다. 벌써 밤은 이슥해졌다.
율리에는 촛대에 불을 켜들고 어린 수녀처럼 쌀쌀하게 방에서 나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후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사나이가 추수와 황제와 사교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동안
리디아는 골드문트와 귀부인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에 대해서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에 온 신경을 모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길게 이야기를 끄는 동안, 말의, 눈초리의, 억양의,
하늘하늘한 몸짓의 질기고 달콤한 그물이 만들어져갔다.
그 어느 것이나 의미 심장한 것이요, 높은 열을 띠고 있었다.
리디아는 그 분위기를 호기심으로 동시에 혐오스러운 감정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골드문트의 무릎이 테이블 밑에서 낯선 귀부인의 무릎에 닿는 것을
보거나 느끼기라도 하면 리디아는 자신의 몸에 닿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랐다.
그날 밤 리디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저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이 잘 거라고 확신하며
깊은 밤중까지 가슴을 졸인 채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이루지 못한 것을 리디아는 상상 속에서 실현시키고 말았다.
리디아는 두 남녀가 부둥켜안는 것을 보고 서로 키스하는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배반당한 기사가 사랑의 유희를 하고 있는 그들을 불의에 습격하여
뻔뻔스러운 골드문트의 가슴에 칼을 꽂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하고,
동시에 바라기도 하면서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날씨가 흐린데다가 눅눅한 바람까지 불었다.
좀더 머물고 가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손님들은 출발을 서둘렀다.
그들 부부가 말을 탈 때 리디아는 옆에 서서
악수를 하고 작별의 인사를 했으나 정신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시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기사의 부인이 말에 오르는 것을 골드문트가 손으로 받쳐주는 것을 보았고
그의 오른쪽 손이 부인의 구두를 꽉 잡는 것을 그녀는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손님들이 떠나자 골드문트는 서재로 가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반 시간 쯤 후에 리디아가 하녀에게 말을 끌어내 오라고 이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싱긋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리디아가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라틴 어 저술은 거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골드문트의 마음은 산란했다.
주인은 친절하게도 평소보다 빨리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골드문트는 몰래 말을 타고 저택을 빠져나와 차갑고 눅눅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퇴색한 풍경 속으로 달려나갔다.
점점 빨리 달리고 있으려니까 안장으로 말의 체온이 전해져
그 자신의 피도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지나고 초원을 넘어 갈대가 자라는 늪지대를 지나쳐
그는 숨을 헐떡이며 음산한 날씨 속으로, 오리나무가 자라는 조그만 골짜기로,
이끼 냄새가 풍기는 전나무 숲을 뚫고 갈색의 적막한 들판을 넘었다.
그는 하늘 아래 높다란 언덕빼기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는 리디아를 발견했다.
그는 곧 그녀를 향해 달려갔고 그녀는 그의 추적을 눈치채고는
속력을 내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가는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함께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미끼를 쫓듯 추격해 가면서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다정스럽게 작은 소리로 말을 격려하면서 기꺼운 눈으로 풍경을 눈여겨 보았다.
웅크리고 앉은 밭이랑, 오리나무 숲, 단풍나무, 늪의 진흙탕 기슭 등.
그러나 그의 눈초리는 쉴새없이 목표를 향해서, 달아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향하여 있었다.
이제 곧 잡히리라.
그가 바짝 따라온 것을 안 리디아는 달리는 것을 단념하고 말의 속도를 줄였다.
리디아는 추격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날렵하게, 태연하게, 마치 거기에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인 것처럼
말을 앞으로만 계속 몰았다.
그는 리디아와 나란해졌다.
두 마리의 말은 서로 나란히 걸어갔다.
말과 기사 모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리디아!"
그는 나지막이 불렀다.
리디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리디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리디아, 당신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멀리서 보니 정말 멋있더군요.
당신의 나부끼는 머리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그리고 당신이 내게서 도망친 모습이란!
이제야 나는 당신이 나를 조금은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소.
여태껏 그걸 눈치채지 못했었지.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 비로소 나는 알았소.
아름답고 사랑스런 리디아! 힘들 텐데 말에서 내리지 않겠소?"
그는 말에서 얼른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리디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고삐를 잡았다.
눈같이 하얀 그녀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에서 안아 내려주었을 때 리디아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는 리디아를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이끌고 가다가
마른 풀 위에 앉히고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녀는 앉아서 울음을 그치려고 애써 자신과 싸웠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아,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오?"
"골드문트, 당신은 여자를 유혹하는 사람이에요.
조금 전에 당신이 나에게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줘요.
그렇게 뻔뻔스러운 말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니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요?
잊어 주세요! 하지만 내가 어제 저녁에 본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어제 저녁에 도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말이오?"
"흥, 시치미 떼지 말아요! 제발 그런 거짓말은 그만 둬요!
내 눈앞에서 그 여자한테 추파를 던지다니, 정말 너무해요!
당신은 수치스럽지도 않았나요?
심지어 당신은 테이블 밑에서 그 여자의 다리를 쓰다듬기까지 했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리고 지금은 그 여자가 가버리자 내 뒤를 쫓았어요!
당신은 정말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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