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진노를 벗어나 살으심의 구원을 받으라

Joyfule 2024. 2. 2. 11:47


    진노를 벗어나 살으심의 구원을 받으라(롬5:9-11)



 제가 1997년에 로마서강해를 할 때에 부산지역에

사역하는 분들이 500여 세트의 강해 테이프를 구입해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 DVD로 옮긴 음질도 좋지 않습니다.

그 때는 로마서 강해 중에 놀라운 성령의 기운이 회중에게 밀려갔습니다.

심지어 부산의 대표적인 교회인 S교회 J목사에게도 전달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울산 서울 마닐라 미국 남미 일본 사이판 등지에서도 강해를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등이 휘어 불구 상태의 성도가 나아서 주님께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근 20년 이상 로마서 전체를 강해하지 않고 저 혼자만 묵상을

거듭하고 아침식사에 그 내용을 반영을 하다가 남은 육체의 때에 로마서를

좀 더 디테일하게 강해를 해서 읽거나 직접 와서 듣는 분들에게 로마서적인

구원이 일어나길 부탁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아침식사로 내보냅니다.

 

Q. 언제 진노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나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9)

 

A. 사망에서 구원은 현재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피로 하는 말씀은 그 피 안에서(원어)입니다.

언제나 피는 약속의 말씀으로 한 잔을 받으신 걸로 생각하세요.

그 피 안에서 하나 된 것, 한 생명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롭다함을 얻어서 진노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말미암아 우리가 주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피 안에서 구원 받았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십자가에 흘린 선지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약속으로

주신 그 한 잔의 피에 참예하므로 주와 한 생명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됩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뒤돌아보고 주께서 십자가에

흘린 그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엡1:7)

 

 

Q. 화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뭡니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A. 구원은 과정이 있습니다. 우선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는

두 단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반대편에 선 원수의 자리의 진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됩니다.

그 다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항상 살아계심의 구원이 있습니다.

항상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공급하심이 있는 것입니다(고전15:45)

예수님은 속죄의 제사장이여 또한 중보의 제사장이십니다.

속죄의 제사장은 십자가에서 영 단번에 죽으시므로 우리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신 곧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지신 속죄의 제사장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과 나 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중보의 제사장이십니다.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으세요?(히7:25)

한 분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이지만 우리의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과 현재적으로 생명을 계속 얻는 구원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 외치는 반쪽 복음은 지금 죄 사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받을 것이라고 믿을 겁니다. 심지어 시온산도 나중에 들어간다고 하지요.

칼빈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사역을 기초로 천상사역을 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또 주님은 우리의 목표이며 과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칼빈을 우습게 여기는 애송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시제로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언제나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요11:25-26)

주의 부활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사망에 갇혀 있던 우리를 다시

살렸고 주께서 생명이시므로 그 생명을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 공급하십니다.

생명을 현재에 주시지 않으면서 너희들은 나를 먹는 너희들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시겠습니까?(요6:57) 만일 주께서 지금 아침식사를 차리신다면

얘들아 이리 와서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자는

요한복음 6장에서 하늘의 생명의 떡을 먹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연결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진노에서 구원하심과 지금도

살아계심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고전15:19) 사망의 종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진노에서 구원은 받은 것은

이해하는데 주님의 항상 살으심의 구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망에 의해 연약과 질병에 속수무책이 되어 스러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면 아니 주께서 다시 오시면 들림을 받아 다시

지상에 내려와서 천년왕국을 이루어 그 안에서 죽음도 병도 눈물도

없이 천년 왕 노릇할 것이라는 공중에 둥둥 애드벌룬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현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신앙의 근본까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단에 속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현재 살아계시므로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는 복이 없으면 자신의 신앙의 기본 뿌리까지 흔들리고 맙니다.

따라서 항상 자신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계산돼야 합니다(롬6:11)

너희 몸과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라(롬6:12-13)는 말씀대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주님으로부터 계속 공급이 없으면 자신이 그 전에

얻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조차도 흔들리고 맙니다.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화목 되었다 이 말씀은 서로 사이가 좋아 졌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존재가 바뀌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죄에서 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삼팔선과 같이 긋고 믿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를 먼저 바꾸시고

우리로 그분과 화목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엡2:16)

 

눅15장에서 탕자가 돌아왔는데 이 아들이 나갈 땐 아들로

갔다가 돌아올 땐 자신의 자격지심에 의해 종으로 돌아왔습니다.

종은 신발을 못 신고 당연히 가락지에 적힌 족보도 없습니다.

좋은 옷도 못 입고 감히 주인의 상에 앉아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서 목욕을 시켜라 옷을 갈아 입혀라

가락지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이는 신분 변화를 말합니다.

신분을 회복한 다음 드디어 그 살찐 송아지를 아버지와 한 상에서 먹습니다.

돼지 똥 냄새가 진동하는 남루한 존재를 그대로 두고 밥을 먹이지 않습니다.

화목이란 십자가의 죽음과 다시 삶으로 인한 나의 신분 변화로 믿는 겁니다.

그 다음에 주께서 먹이십니다. 그 살찐 송아지를 먹듯 주를 먹습니다.

 

문둥이 같은 탕자를 용서해서 목욕시켜 좋은 옷 입히고

가락지 끼워 아들로 회복시켜 일등 신사를 만든 후 먹여 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저주로 인함입니다.

그건 분명히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에 내리는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여섯 시간 동안 다 받으셨어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만큼 무시무시해요. 그래서 아들을 순종하지 않으면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요3:36) 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롬6:23) 십자가에 앞에서 예수를 믿는다면서 여전히

죄의 자리에서 사망을 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므로

우리가 죄에 대한 진노로부터 벗어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우릴 진노에서 끄집어내서 그리스도 안에

옮겨 놓으신 그 이후에 더 풍성한 복이 없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영생이란 그렇게 밋밋하고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골자는 죽으면 영생, 죽으면 천국이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없을 때도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노래 했습니다.

다윗이 이미 그렇게 믿었는데 십자가의 엄청난 사건을 우리에게 전시해 놓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처리하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으신 다음에 아무 것도 없이 장차 다 이루어지리라 하시겠느냐 하는 말이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놓은 이후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천당에 올 때까지 잘 참아라가 전부일까요?

이런 것이 구원이겠습니까? 만약 이게 구원이라면 저는 당장 그만 두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이 전부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시는 그 생명의 풍성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상태에 있는 자녀에게 베푸시는 것을 왜 아끼시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아들과 함께 은사를 주신다(롬8:32) 라고 하십니다.

그 아들과 함께할 때에 주시는 그 은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바로 그 분의 생명입니다(롬6:2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약속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요일2:25)

이 영원한 생명을 가볍게 보지 마세요. 그 약속을 믿으므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이며 은사이며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Q.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다음 다른 복이 무엇입니까?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

 

A.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합니다(느8:10)

또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즐거움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잘 못 되었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을 바라지 않고 

이방인이 바라는 걸 믿고 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여겨지는 불만이 가득하겠지요. 

그래서 기쁨이 없는 사람은 좋게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향한 순례자로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로 창세기 1장에서 작정하신 하나님의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해 주십니다.

창세기 1장 보면 빛과 어둠, 낮과 밤,

궁창 위에 물(단수)과 궁창 아래 물들(복수), 땅과 바다,  

큰 광명과 작은 광명, 낮의 광명 밤의 광명

공중의 새와  바다에서 사는 것들 그리고 짐승과 사람

땅의 모든 물이 한 곳에 모여 바다가 되는데

우리는 다 거기로 떠내려갔었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신기한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으로 올라 왔어요,

 거기서 우리가 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하나님께 까지 올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결국이라고 하는 겁니다(벧전1:9) 

 

엡4장7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도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이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그 안에 택한 자들을 끌어안고 다시 올라가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셨는데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충만케 하실 그 분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들이 듣고 지키므로 로마서의 구원이 이루어져 그 생명의 충만함으로 길길이 뛰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