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하나님의 상속자들의 사명

Joyfule 2024. 3. 9. 01:57


   하나님의 상속자들의 사명(롬8:18-22)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고후2:14)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냄새입니다.

하나님께는 제물이 되는 향기이며(고후2:15)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고후2:16)

물질이 고체가 액체가 된 후에 기화가 되면 냄새가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 안에 내주역사하시면 고체화된 사망의 몸에서

믿는 자 안에 생수가 역사하십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생명의 파장이 뿜어져 나옵니다.

아름답지만 하나님의 신성의 기운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포스(force)이며 영적인 카리스마가 됩니다. 지도자들에겐 필수입니다.

그야말로 이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형상이 외적으로 표현이 되는 모습입니다.

건강미와 다른 생명의 기운이 파장으로 뿜어 나온다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냄새입니다.

어린아이는 육신의 싱싱함과 풋풋함이 있어서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늙어 가면 죽음의 기운이 온 몸에 가득해 지므로 싫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의 복은 같이 있고 싶어지고 무엇인가 주고 싶은 겁니다.

 

Q. 하나님의 상속자는 반드시 고난을 받나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A,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이고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와 함께 받을 영광을 위하여 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 곧 장차 나타날 계시와 도무지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이 말은 동격이며 한 영과 한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등을 하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하나가 되어 달려서 일등 시상식에 참예하기 위해서 고난이 필수입니다.

 

모든 고난은 말씀과 함께 통과하면 어떠한 고난이든지 유익이 됩니다.

그래서 고난 받은 것이 유익이라 이로 인해 주의 율례를 배웠다고 노래합니다(시119:71)

그러나 말씀에 의한 연단을 받지 못하면 그 고난은 단순한 고통일 뿐입니다.

주의 율례는 말씀의 적용방법을 깨닫는 겁니다. 고난을 통해 자기 육신을

포기하도록 하지 못한 고난은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 나아가야

되는데 그들의 마음에는 ‘내가 고통을 이만큼 받았으면 된 것 아닙니까?’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나의 갈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하고 욥과 같이 고난 중에서도 고집스럽게 버팁니다.

그래서 욥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잔소리를 가장 길게 듣는 자가 됩니다(욥38-41장)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를 팔아넘겨야 합니다.

이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자신이 상속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코스입니다.

소유는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된 것만 아니라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고 나서

이 교회 건물의 반은 내가 헌금한 거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건 소유를 옮긴 것일 뿐

소유를 포기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가 포기되었다 함은 그 소유가 잊어지는 겁니다.

자신의 소유가 포기 된 자들에게 그 계시된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이 죽었으니 성령을 좇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나타나도록 반복 훈련을 해야 합니다(갈5장) 10년에 안 되면 20년, 30년을 해야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습니다.

 

Q. 피조물들이 학수고대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피조물에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A. 여기에서 나오는 피조물은 나무나 짐승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하고

다른 피조물인데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요10:16)

여기서 피조물은 사람들입니다. 자연 만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반려동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겠어요? 그들을 예뻐해 주는 주인이면 되죠.

우리의 구원의 영광스러움을 자연에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그 고대하는 바가 뭐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대한다는 말은 학수고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 

그 영광의 자유를 사람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잖아요? 교회에 설교에 재미를 붙여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과연 목사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가 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잖아요?

 

Q,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뜻인가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이라 하심은 거짓 종교에 굴복하고 있을 수도 있고,

미신적인 종교나 기복주의 신앙에 굴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허무하지 않고 언제나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는 알고 예배하고,

너희는 알지 못하고 예배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4:22)

예컨대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막연한 지식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요4:24)

 

현재 기독교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를 보여서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밝은 생명의 길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와 종교적인 의식을 따라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계시는 드러나는 것이고 허무한 것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시한 것들에게 붙잡혀 수용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시된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삶을 통해 그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Q. 무엇을 보여줘야 하나요?

“그 바라보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A. 어느 시대이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것이 뭔지 스스로 잘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를 보여주는 삶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으면 그들에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벧전3:15)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따라옵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 맘대로 못하고,

성령의 인도로 사는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우리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왕자들이고 상속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죄를 다루고 있으며 거기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게 복이다’ 라는 말에 허무하게 굴복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영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현재 고난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니라(창2:7)

하신 이런 사람들이 바로 피조물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하고 있습니다.

탄식은 내적이고 고통은 외적입니다. 우리는 광적인 신자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외적으로 성령이 나타나는 은사운동을 보세요.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허무한데 굴복치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막연한 불쾌감과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인 열정을 갖는다던가,

자신의 죄 때문에 다른 대용품을 바치는 그런 유치한 종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통해 성경이 번역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는 부끄럼이 없고 떳떳한 것이기 때문에

핍박은 받을 수 있어도 누구라도 흠을 잡고 대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허무한데 굴복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굴복하면서 탄식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창세기 1장2절 처럼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흑암에 빛이 들어와서 빛과 어둠으로 나누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낮과 밤, 땅과 바다를 나누셔서 혼돈을

처리하시고, 씨 맺는 채소와 씨를 가진 열매 맺는 나무로 공허를 채우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이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리는 세계가 됩니다.

하나님은 빛과 생명과 사랑이시기 때문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영광을 향한 고난이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