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성령이 탄식하며 간구하신다

Joyfule 2024. 3. 11. 23:35


   성령이 탄식하며 간구하신다(롬8:26-28)



성령의 나타나심만 강조하는 미국의 일부 목사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교회에도 소위 신사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아르헨티나에 가니 거기도 여간 아니게 그 운동이 활발하더라고요.

문제는 그들의 영적인 돌파구를 대체할 대안을 교회가 제시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실존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임재하심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주 역사 충만하게 하시는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므로 감성적인 열광주의에 휩싸입니다.

그렇다고 말씀만 주장하는 지성적인 경건주의 또한 보란 듯 육체의 신앙일 뿐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통일시켜 의지를 강하게 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Q. 왜 성령이 탄식하며 중보를 하시는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A.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상속자이지만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참음으로 몸의 구속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들을 위해 친히 탄식하며 간구하십니다.

성령이 불 말과 불 병거와 같이 지키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 같이 함께 하십니다.

피조물들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기다리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자신의 구원을 사모하고,

성령은 우리의 연약을 도우시면서 탄식하며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게 우리의 영적환경입니다.

이와 같은 완벽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괜찮은 길을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그 마땅히

기도할 내용을 위해 지금도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의 신음 소리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이 잘 살든 못 살든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말할 수없는 탄식을 뱉으면서 애타게 자녀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정작 가서 뵐 때는 아무렇지 않는 듯 그래 왔냐하고 안도하십니다.

그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뜨거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마음을 좀 알아가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도 압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탄식하십니다.

왜요? 성령님 자체가 하나님 자녀들의 집(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의 집인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간절한 마음과 간절한 생각과

간절한 뜻만 가져도 그것이 언젠가는 뜨거운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어찌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사실 저도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제게 불꽃이 타오르듯

‘내가 주를 위해 죽을 자리가 어디냐?’ 하는 복음을 위한 강한 열정이 나타났습니다.

 

Q. 성령께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시는가요?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A. 성령이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 아시는 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알고,

성령님은 우리를 알고, 또 성령님은 하나님을 아시므로 성령님은 양쪽을

다 알기 때문에 능히 중보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알고 또 어머니는 우리 사정을 알고,

중간에서 양쪽의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탄식하시잖아요.

어머니는 양쪽을 다 내통하시잖아요? 성령이 그러하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는 뜻은 성령이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지? 성령이 무엇을 내다보고 있는지?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성령님을 항상 존귀하게 여깁시다.

제가 이글을 쓰는 지금 다시 한 번 성령님께 대한 경각심을 다 잡고 있습니다. 

 

성령님 그 분을 우리 속에서 믿음으로 살리면 내가 삽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우리는 영을 좇아 살아야 천국의 복을 누리는 것인데 성령을 소멸시켜

내 영과 생명을 내가 죽여 버리면 무슨 맛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항상 존중히 여기십시오.

내 안에서 그 분이 활동하지 않으시면 내가 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다, 안 들었다 합니다.

왜요?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머리가 복잡해 더 이상 안 들어갑니다.

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배를 크게 해 주시기 때문에 한없이 들어갑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조금만 차면 이만하면 됐다 하는 포만감이 오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배우고 나면 더 이상 안 배우려고 해요. 매우 조심할 일입니다.

 

아이들이 젖 맛을 잊으면 엄마 곁을 떠나서 혼자 놉니다.

젖 맛을 잊어버리면 떠나요. 오락이나 장난감을 갖고 놀뿐 엄마한테 안 가요.

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실제적으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합니다.

사모하는 마음만 항상 마음속에 시동을 걸어 놓으면 성령의 감동과 가르치심과

생각나게 하심은 항상 지속이 됩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령을 어떻게 아느냐?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제가 그를 사모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실 겁니다. 이게 제 대답입니다.

 

말씀과 성령과 상통하는 개념이 없으면 그만 시들해 집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반석 신앙이 되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리하면 성전이 될 것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될 것이다 말한 것입니다(벧전2장)

반석 신앙은 어린아이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사모하면 성전이 되고, 택한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와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항상 믿어야 합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존재만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존재는 안 믿고 임재만 믿는 사람 있어요.

어떤 사람은 역사만 믿고는 그 분의 존재를 안 믿으니까

그 역사하심과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므로 자기 멋대로 돌아갑니다.

존재, 임재, 역사를 함께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인격적으로 역사합니다.

진짜 반석 신앙이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모하고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이건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Q. 어떠한 사람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A.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말씀이 이쯤 이루어지면 드디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짜내는 게 아닙니다.

롬8:18절은 ‘생각하건대’ 로 시작하지만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하고 나옵니다.

‘생각하건대’ 하고 ‘우리가 알거니와’는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자기 욕심을 죽여 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을

사모하며 몸을 쳐 복종시켜 기다릴 정도 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롬8:29-30)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은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우리 입장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데  하나님으로부터는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입장과 우리 입장이 서로 같아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분을 일방적으로 사랑해도 안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짝사랑해서도 안 됩니다.

 

 

예정이란 말은 어떤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정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예정(한정)된 우리라는 뜻입니다. 이건 개인의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정을 입으면 우리 편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정된 사람들이지만 그 한정된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줄로 재어진 구역(시16:6)을 압니다. 이것이 바로 한정이고 예정입니다.

그 줄로 재어진 구역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보상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냥 사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와 주셨기 때문에 사랑한다가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신 그 사랑으로 인해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 사이의 신기한 메커니즘입니다.

우리 부모가 고생을 잔뜩 해서 재산을 물려주었으니 우리가 사랑해야 돼 하는 건 아니죠.

아무리 부모가 못났더라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저절로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내가 행복해 지는 길입니다. 부모가 나를 잘 키워 주셨고, 아직 물려줄

재산이 많이 남아 있기에 사랑한다는 건 조건적인 것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십니다.

사랑 앞엔 자존심이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런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 만사 새옹지마란 말처럼 되었다거나 인생역전이 되어 전화위복이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설명은 바로 뒤에 있는 롬8:29-30절에 따라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