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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4.

Joyfule 2007. 1. 2. 02:47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4.

제4장 영도권 장악을 위한 감리교회 분규


1.재건총회와 부흥총회의 대립

선학 방법론의 차이 또는 신앙 노선의 상위보다는 교회 정체나 교권의 쟁탈 문제로 분열한 것이 한국의 감리교회라고 하는데 흥미가 있다. 감리교에서는 6.25 동란으로 김유순감독 이하 40여명의 중진 교역자들이 공산군에 의하여 남북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감리교에서는 이로 인하여 교회 운영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므로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모인 임시 총회에서 당시 신학교 교장인 류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류형기 목사는 감독의 자격으로 연회 회원으로 계속 6년간 지냈어야 한다는 법규에 걸려 불가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눈치빠른 그는 재빨리 사퇴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한국 감리교의 재건을 위하여 내한한 모어(Moore)감독은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이 비상 시기에 있으니만큼 이번 총회에 한하여 6년 계속 시무의 조항을 보류하자"라고 피력하여 총회원 일동이 총 기립하여 찬동하는 의사를 표시하므로 극적인 타개를 이루었음은 가관이었다.

그후 2년이 지나 감독의 임기가 만료되는 1953년에 소집된 총회에서 류형기 감독의 재선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 교회의 재정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한국 감리교가 류형기 감독의 존재를 계속 필요로 하고 있었을런지 모르지마는 임시 편법을 자주 사용함은 부당하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청리원 측의 태도에 견제를 가하게 되었다. 이들이 주로 부흥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해방 직후에 크게 노출된 부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의 양상을 이해하기가 쉽다. 분규의 주인은 계속하여 교계의 영도권 장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2. 호헌(護憲) 주장으로 인한 불협화 발음

1954년 3월의 정기 총회는 마침내 부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의 각축장으로 화하게 되었고 종교불 흑막의 폭로등으로 공격의 화살은 맹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원 측의 위세는 다수의 힘을 빌어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혁안의 통과와 함께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강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다수결에 밀려난 회원들은 개헌의 목적이 일부 인사들의 교권 장악에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여 1955년 3월에 천안에서 전국 신도대회를 열어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여 분리를 선언하였다. 이를 소위 호헌총회라고 부른다.

류형기 감독은 1958년 10월 총회시에 자신의 부족을 말하면서 분리된 양 교회의 합동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주효하여 양측의 대표 위원들은 수차에 걸친 회합 후에 무조건 합동하기로 합의하여 1959년 연합 총회에서 하나가 되었고 김종필 감독이 이를 사회하였다. 이리하여 4년만에 분리되었던 감리교 총회는 4년이 지나면서 또 다시 합동하여 일종 순환식 현상과 같은 묘한 특이성을 노증시켰다.

한국의 감리교는 교회의 바탕을 신학적인 것 보다는 도덕적 신령적 차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행정의 기략과 높은 경건의 결의만 있으면 장로회에서처럼 심각한 분열을 지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통합의 여지가 있음이 다행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