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울서신 속에 나타난 성령
바울 서신은 신약성서에서 성령론에 대해 충분히 다루었다. 성령에게 탁월한 지위를 부여해 준 사도행전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영적인 능력(살전 1:5)과 내적인 기쁨(살전 1:6)과 도덕적 정결함(살전4:4-8)과 종교적인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과 더불어 관련시켰다.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은사를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를 멸시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령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삼가라고 권면하였다(살후2:12). 이러한 중요한 문제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른 곳에서 명백하게 표현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계시로 간주할 수 있는 성령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며(롬8:16)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분(롬8:15,갈4:6)은 성령이시다. 그들의 기도를 도와 주신다고 되어 있다(롬8:26).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중에 좀 더 어려운 면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성령의 관계에 관한 그의 개념이다. 후에 더 언급하게 되지만 교회의 보편적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은 성삼위 한 분으로서 신성의 구별된 한 인격(Person, 혹은 위이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 바울이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성령이 상호 관련된 방법에 대한 "형이상학적"문제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로마서 8:9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그리스도"를 서로 바꿀 수 있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 모든 표현은 광의로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즉 성령은 신자가 사는 삶의 영역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해방] 시켜 준 새로운 능력의 삶의 영역이다(롬8:2).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는 단순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인가?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바를 상기해야 했다. 어떤 학자는 이 문장을 뒤집어 [성령은 주시니]라고 읽으므로써 성령의 주권과 신성을 확증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주]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주이신 그는 바로 성령 그 자신이시다(18절의 끝맺음을 보라). 따라서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과 [성령 안]이라는 두 관용적 표현 사이에 어떤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성령이 그의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시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한에서 성령은 영광을 얻으신 주 곧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바울은 그가 전도한 회심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고통하심"(고후13:13)을 기원했는가? 삼위 하나님의 축도를 tkdydg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은 바울서신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도 불리웠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혹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라고 했다.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다. 성령께서 거하시고 일하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이 인간의 일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고전2:11). 이것은 바울의 심중에 그가 성부로 보여준 하나님과 신자의 마음 가운데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으로서의 하나님 사이에 아무 구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주님과 사람으로 하여금 주 예수를 부르게 하는 분, 곧 성령 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했다고 추측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전 12:3).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표현은 이들 사이의 동일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학적인(dynamic)동일시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그의 교회 안에 거하시고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라는 관용적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로서 같은 뜻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성령에 대한 대부분의 참고 구절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께서 한 사람 안에 "거하실"(indwells)때 그 사람의 생활 속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는 이러한 덕성과 은혜와 더불어(고전3:16) 부활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리라"(롬8:11).
바울이 인간의 영(spirit)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의 영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특히 이러한 어려움은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키는 구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육체적 욕망은 성령(혹은 영)을 거스리고 성령(혹은 영)은 육체를 거스린다(갈5:17).육체(flesh)는 인간성의 약하고 죄된 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고 이에 반하여 영(spirit)은 인간의 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즉 육체적 욕망과 더불어 싸울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능력을 준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육체와 더불어 싸우는 영의 사람은 영(혹은 성령)을 좇아 영(혹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롬8:5). 이와 유사한 대조를 고린도전서 3:1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들 사이를 구분하였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의 저급한 본성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다. 반대로 신령한 자(영적인 사람)는 성령이 지도하고 다스리는 영(spirit),즉 고등한 본성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성령은 그 작용에 있어서 동일하다(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여 삶의 매 순간에 성령의 인도와 돌보심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인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다(롬14:17).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넘치는 사람이다(롬15:13).
보통 웨슬레(Wesleyan) 전통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신약성서 개념에 아주 기본적이기 때문에 그 교리는 결코 곡해될 수 없는 기독교적 메시지이다. "완전주의"의 모든 형태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사람도 물론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비록 그 나무의 뿌리는 볼 수 없게 감추어져 있지만 그 열매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열려 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을 권면하였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맏으라"(엡 5:18). 만일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였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그렇다면 술취함의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구속적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삶 가운데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차이점도 그들이 알아 볼 수 없겠는가? 올바른 태도를 취하기 위해 신중을 기해야 랄 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소위 "더 높은 수준의"(higher) 혹은 "승리하는"(victorious)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완전"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결코 어떤 용이한 법칙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러한 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지만(롬 8:2) 아직도 여전히 또 다른 율법이 남아 있다(7:21절 이하). 이 음흉하고 사악한 "죄의 법"의 세력에서 구원받는 것은 어떤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즉석의 순간적이며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육신"(육체)과 "영"(성령)의 개념 배후에 있는 또 다른 대조는 바울이 영과 의문(the letter)사이에 묘사하는 대조이다. 우리는 율법(기록된 법전)d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고 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묘사하면서 말하기를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6)고 했다.그러나 율법을 영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롬7:14)인간이 그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의 외적인 법적으로 보았으므로 율법은 단지 사망을 집행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그 죄로부터는 결코 구원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롬3:20).유대주의자가 이해하는 바 대로 생각해 볼 때 그 율법은 성령을 대적하고 성령은 그 율법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구원의 방법으로 그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성령에 관한 바울의 교훈을 끝맺기 전에, 성령과 교회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말이 있다. 성령은 진정한 교회의 표식 중에 하나로 여겨지는 보편적 연합의 띠이다(엡4:3).여기서 바울의 사상을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의 상징과 연결 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전 12:12-27).성령은 그 몸에 생명을 불어 놓는 분이시다. 한 성령으로 모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전 12:13).이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고전14:2).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골1:8). 그들은 성령 안에서 교제한다(빌2:1).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빌3:3).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불어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엡2:22). 따라서 교회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고후3:3).
'━━ 영성을 위한 ━━ >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바울서신 외에 신약성서 나타난 성령론 (0) | 2025.02.24 |
---|---|
3.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0) | 2025.02.19 |
성령 (0) | 2025.02.17 |
교회사 5.(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0) | 2025.02.14 |
교회사 4.(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0) | 2025.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