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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붉어진 얼굴은 늦은 석양빛으로 낭만적인 감정이 맴돌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숨을 죽이고 그녀의 몸 쪽으로 다가가도록 했다.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선 붉은빛이 사라지고,
해질 무렵이면 아이들이 즐거웠던 거리에서 떠나가듯
햇살 또한 한 줄기 한 줄기 서운한 듯 머뭇거리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져 갔다.
하인들이 돌아와서 탐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러자 탐은 찡그리며 의자를 뒤로 밀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듯이 데이지는 다시 앞으로 몸을 숙였고,
그녀의 목소리는 열기를 띠고 들떠 있었다.
"닉 오빠를 우리 집 저녁 식사에 모시게 되어 기뻐요.
오빠를 보고 있으면 아름답게 핀 장미꽃이 생각나요. 안 그러니?"
그녀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베이커 양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장미를?'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어디 한 군데도 장미와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다.
데이지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었지만,
그녀에게서는 사람을 충동시키는 마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심장이 그 숨막히고 떨리는 낱말 하나 하나에 숨겨진 채
무방비 상태로 상대를 향해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냅킨을 식탁 위에 던지고는 실례하겠다고 짧게 말한 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베이커 양과 나는 아무 뜻 없이 무의식적으로 잠시 눈길을 주고받았다.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재빠르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경계하는 목소리로,
"쉬!"하고 말했다.
저 쪽 방에서 흥분을 억제하며 숨을 죽여 가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자,
베이커 양은 예의도 잊은 듯 엿들으려고 몸을 안쪽으로 굽혔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끊어질 듯 떨리며 낮아졌다가 흥분되어 커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그쳐 버렸다.
"조금 전에 말한 그 개츠비라는 사람은 바로 나의 이웃입니다. 옆집에 살고 있지요."
나는 말을 꺼냈다.
"가만 계세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물었다.
"설마 당신이 모르신다는 거예요?"
베이커 양이 정말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난 모릅니다."
"그래요..."
그녀는 망설이며 말했다.
"탐은 뉴욕에 사귀는 여자가 있어요."
"여자가 있다구요?"
나는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베이커 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저녁 식사시간에는 전화를 삼가는 조심성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터벅거리는 부츠 소리가 들리더니 탐과 데이지가 식탁으로 되돌아왔다.
"미안해요!"
데이지가 아주 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베이커 양과 나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잠깐 바깥을 둘러보았지요. 나가 보니 아주 상쾌하더군요.
잔디밭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는데,
큐나드 해운 회사나 화이트 스타 해운 회사의 배를 타고 건너온 나이팅게일 같았어요.
그 새는 지저귀며 날아가 버렸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로맨틱하지요, 안 그래요, 탐?"하고 그녀는 계속 말했다.
"굉장히 로맨틱한데."
탐은 이렇게 말하고 난 뒤 괴로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녁 식사 후에도 날이 어두워지지 않으면 저 아래 있는 마구간을 보여 주고 싶은데."
그 때 또다시 안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데이지가 탐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자 마구간 문제-사실상 모든 문제-는 없어져 버렸다.
엉망이 된 그 날 저녁 식탁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는
아무 의미도 없이 촛불이 다시 켜졌던 일뿐이었다.
나는 모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으나
왠지 모두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탐이나 데이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베이커 양마저 그 전화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이 복잡하게 얽힌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내 성미대로라면 전화로 경찰을 당장 불렀으면 싶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마구간에 관한 얘기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탐과 베이커양은 약간의 간격을 둔 황혼 속에서 실제로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시체 옆으로 밤샘이라도 하러 가듯이 서재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한편 나는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약간 귀가 들리지 않는 체해 보이며
데이지의 뒤를 따라 연결된 길다란 베란다를 돌아 정면 현관으로 갔다.
데이지는 마치 자신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손으로 느끼기라도 하려는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두 눈은 벨벳 색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몹시 흥분한 것처럼 보여 나는 다소나마 그녀를 진정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린 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닉 오빠,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육촌 간이면서도 오빠는 제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잖아요."
"그 때는 내가 전쟁터에 있었기 때문이지."
"아참, 그랬지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구요, 저는 그 동안 인생을 너무 무의미하게 살아 왔어요.
그래서 무슨 일에든지 상당히 냉소적으로 대하는 나쁜 버릇이 생기고 말았죠."
확실히 그녀가 그렇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딸 문제를 다시 화제에 올렸다.
"그 애는 말도 하고 먹기도 하고 무엇이든 다 하겠는걸."
"네, 그래요."
그녀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닉 오빠, 그 아이를 낳았을 때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세요?"
"글세?"
"그 얘길 들으시면 제가 세상사를 어떻게 느끼고 살아 왔는지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탐은 행방을 감추었어요.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완전히 자포자기해 버린 저는 간호사에게 아들인지 딸인지를 물었어요.
그러자 딸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전 고개를 돌리고 울었어요. '좋아.' 하고 전 말했어요.
'여자 애라 다행이다. 그러나 좀 멍청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이 세상에서 여자가 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니까. 예쁘고 귀여운 바보가 되는 것이.'
오빠도 알겠지만, 전 이 세상 모든 일이 끔찍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심지어 의식이 깬 사람들 조차도요.
그리고 전 알아요. 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별의별 걸 다 보고, 많은 일들을 겪어 보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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