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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위인 - 죤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신앙위인 - 죤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2. 죤 낙스의 활동(사역)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첫번째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의 재능있는 젊은이(a talented youth)였다. 그는 파리와 루뱅(Louvain)에서 공부했고, 후에는 독일의 개혁된 대학인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27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시작했다. 1528년 2월 29일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루터적 단계(the L..

신앙위인 - 죤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신앙위인 - 죤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 역사적 배경 스코틀랜드는 문명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예술은 놀라울 정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와 비교할 때 백성들은 야만적(barbarous) 이었고, 땅은 개척되지 못했다. 여러 세기 동안 민족(nation)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로마 제국은 어떤 시기에도 스코틀랜드를 차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종교는 조잡했고 미신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의 명백한 우위성 앞에 굴복하였다. 즉 스코틀랜드는 본래 외국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국가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이름은 성니니안(St. Ninian)의 이름이다. 그는 4세기 중엽에 태..

신앙위인 - (Charles G. Finney, 1792-1875) 2.

신앙위인 - (Charles G. Finney, 1792-1875) 2. 성령 충만을 어떻게 받았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자. 자신의 회심에 대한 말에 이어 계속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들(피니와 스콰이아 라이트)은 기물들과 책들을 다른 사무실로 옮기게 되었다. 이 일에 우리들은 매우 바빴으므로 그 오후에 거의 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매우 평온했고, 나의 생각과 느낌에는 대단한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있었다.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며, 조금도 내게 걸림이 없었다. 저녁이 되기 전 한 생각이 내 마음에 떠올랐는데 새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되자마자 다시 기도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 영혼에 대한 어떤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저 계속 기도하려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어 우..

신앙위인 - (Charles G. Finney, 1792-1875) 1.

신앙위인 - (Charles G. Finney, 1792-1875) 1. 찰스 지 피니는 사도들 이후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전도자요, 신학자로 여겨지고 있다. 1857년과 1858년 사이에 피니의 수고의 직, 간접적인 결과로 10만 명이나 주께로 인도되었고, 그의 집회로 시작된 대 부흥의 역사에서 50만 명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른 놀라운 사실은 실제적인 연구 조사에서 나타난 것인데, 피니의 집회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되었다고 고백한 100명 중에 85명 이상이 계속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무디 처럼 유명한 대 전도자의 경우에 그리스도께 회심 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들 중 70%가 후에 믿음에서 떠난 것으로 나타난 것을 생각할 때 피니의 경우는 놀라운 것이다. 피니는 사람들의 양..

신앙위인 - 한국교회가 잊은 피득 선교사

신앙위인 - 한국교회가 잊은 피득 선교사 직접 묘지 찾아낸 박준서 명예교수미국 LA 패서디나 지역 외곽의 ‘마운틴 뷰’ 공용묘지에 있는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묘지. 오른쪽 사진은 아르메니안 성경을 번역한 선교사 묘지로 큰 묘석과 잘 관리된 모습이 같은 공용묘지에 있는 피터스 목사의 무덤과 대조된다. 박준서 교수 제공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가 1898년 한글로 번역한 ‘시편촬요’ 표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383장)와 ‘주여 우리 무리를’(75장)의 작사가 역시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다. 찬송가에는 한글명 피득으로 표기돼 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제공 청년시절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의 모습(왼쪽 사진). 두 번째 부인 에바 필드 여사, 두 아들과 찍은 가족 사진(오른..

신앙위인 - 스미스 위글스워스

신앙위인 - 스미스 위글스워스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1859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서 1947년 88세의 건강한 상태에서 사랑하는 주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기까지 그가 남긴 '그 능력의 비밀'은 전무후무하게 두드러진 것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배우지를 못했고, 처음에는 배관공으로 일했다. 그는 ‘폴리 피더스톤’ 이라는 믿음이 신실한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믿음과 꾸준한 교육으로 글을 깨우쳐 주었다. 글을 깨우친 그는 책중에서 성경책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평생에 읽은 책은 오직 성경 책 뿐일 정도로 그는 성경에 매료되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성경을 읽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온전히 가득 차고 지배했을 때, 그는 성령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전 세..

신앙위인 -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신앙위인 -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구약성경 마지막 책의 저자 ‘말라기’(말 1:1)는 유대교 전통에서도 마지막 예언자로 간주된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말라기’(말르아키·나의 사신, 3:1, 4:5)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암흑기에 마지막으로 활동한 ‘야웨의 사신(使臣)’(말라키야)이었다. 그는 다가올 야웨의 날(4:5)과 메시야를 예고했던 예언자들(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가운데 메시야를 최근 거리에서 바라본 사람이었고, 빛으로 오시는 메시야(4:2) 곧 그리스도 강림 직전의 칠흑 같이 어두운 시대에 마지막 경고와 희망(1:1)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다. 말라기가 사역했던 시대가 암흑기였다는 사실은 그를 통해 전달된 야웨의 경고에 대하여 조목조목 따지며 야웨를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경박하고..

성경인물 - 가인의 후예 라멕

성경인물 - 가인의 후예 라멕 라멕(Lamech)은 아담의 7대 후손이고 가인의 6대째 자손이지만, 모든 면에서 특히 교만하고 포악한 언행심사(言行心思)에서 아담보다 가인을 빼닮았으므로 ‘가인의 후예’라 부르기에 족하다. 자신의 직계 조상인 가인처럼 그는 자신의 명예나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어른이든 소년이든 나이를 불문하고 자기 아들(두발가인)이 만든 철제 무기로(창 4:22) 잔인하게 살해한 무법자였다. 그는 가인보다 더 포악하게 살해된 시체를 벌여놓고 두 아내는 물론 자녀들까지 악기(4:21)를 들고 오게 한 다음 마치 사냥군이 사냥감을 내려다보듯 자만의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노래를 부른 사람이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신앙위인 - 가버나움의 백부장(눅7:1-10)

신앙위인 - 가버나움의 백부장(눅7:1-10) ● 신약성경을 읽는 가운데 우리는 다섯명의 백부장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책임자였던 백부장, 가이샤랴 이달리야대의 백부장 고넬료,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고문을 당할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백부장, 또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할 때 책임을 맡았던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등이 있다. 당시 로마의 군대는 한 개의 군단이 6천명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한 군단을 600명씩 10대로 나누고, 이를 다시 100명 단위로 나누어, 그 100명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백부장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백부장은 오늘날의 군대조직에 비교하면, 구성인원은 중대장 정도의 보직에 해당하나, 당시의 인원동원능력에 비추어 볼 ..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9. 예레미야 - 영적 지도자는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을 쏟아붓는 사람입니다. (참조. 사 20:9) 우리는 예레미야,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쇠퇴에 대해 슬퍼하며, 가슴아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용기있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고, 핍박했습니다. 그는 반역자로 몰려 감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궁전에서나 길 모퉁이에서나 어디에서나 임박한 심판을 끊임없이 증거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그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패망해 가는, 쇠퇴해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지도자, 그는 사랑을 가진 용기있는 하..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7. 느헤미야 - 영적 지도자는 무너진 하나님의 역사앞에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하면 “아하!” 하며 나오는 한마디, 그것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훼파된 예루살렘 성의 소식을 접하고 그는 수일을 울고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훼파된 예루살렘 성앞에서 책임을 통감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어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환란과 능욕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없이 무참히 깨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앞에 영적인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그는 재건하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기를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5. 다윗 -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로 말미암아 10년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오직 사울의 시기심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면서 몇편의 시편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그는 사실 두 번이나 사울을 ..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3. 여호수아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전하는 사람 여호수아는 믿음과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로부터 가나안 정탐 명령을 받고,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정탐후 이들의 정탐보고는 각기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영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그러한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형편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그 가나안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충만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1. 아브라함 - 영적 지도자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 12:1-3은 그 유명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을 좇아갔고, 믿음으로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가 믿었던 약속의 말씀은 자기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과 그를 만민 구속 역사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태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라를 통해서는 자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처음에 몇번 불신의 늪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그에..

신앙위인 - 전주의 한알의 밀 - 데이비스 선교사

신앙위인 - 전주의 한알의 밀 - 데이비스 선교사 오늘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조선에 ,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님이신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조선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 선교의 시급성에 대한 호소를 듣고 , 데이비스는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조선에 오기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중병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었기 때문에 , 데이비스는 떠나는 날을 늦추려 하였지만, 어머니가 강력하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그래도 어머니를 돌보면서 떠나는 날을 늦추었지만 , 어머니는 내 말에 순종하라고 하면서 야단치듯 빨리 떠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