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3769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7. 느헤미야 - 영적 지도자는 무너진 하나님의 역사앞에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하면 “아하!” 하며 나오는 한마디, 그것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훼파된 예루살렘 성의 소식을 접하고 그는 수일을 울고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훼파된 예루살렘 성앞에서 책임을 통감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어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환란과 능욕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없이 무참히 깨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앞에 영적인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그는 재건하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기를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5. 다윗 -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로 말미암아 10년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오직 사울의 시기심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면서 몇편의 시편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그는 사실 두 번이나 사울을 ..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3. 여호수아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전하는 사람 여호수아는 믿음과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로부터 가나안 정탐 명령을 받고,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정탐후 이들의 정탐보고는 각기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영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그러한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형편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그 가나안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충만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신앙위인 - 구약 10인의 지도자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1. 아브라함 - 영적 지도자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 12:1-3은 그 유명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을 좇아갔고, 믿음으로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가 믿었던 약속의 말씀은 자기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과 그를 만민 구속 역사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태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라를 통해서는 자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처음에 몇번 불신의 늪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그에..

전주의 한알의 밀 - 데이비스 선교사

신앙위인 - 전주의 한알의 밀 - 데이비스 선교사 오늘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조선에 ,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님이신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조선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 선교의 시급성에 대한 호소를 듣고 , 데이비스는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조선에 오기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중병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었기 때문에 , 데이비스는 떠나는 날을 늦추려 하였지만, 어머니가 강력하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그래도 어머니를 돌보면서 떠나는 날을 늦추었지만 , 어머니는 내 말에 순종하라고 하면서 야단치듯 빨리 떠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9) 주님 안에서 잠들다 1905년(68세) 수상 임기를 마친 카이퍼 박사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로 1년 남짓 여행을 떠났다. 1902년 수상직을 수행하면서 생긴 자유대학 교수직은 그 동안 바빙크 박사가 대신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돌아와서도 카이퍼는 학교의 청빙에 응하지 않고 쉬기를 원했고 1907년 70세가 된 그는 명예퇴직을 했다. 반면, 바빙크는 카이퍼가 없는 기간 동안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도 맡고 있었는데, 1907년 10월 그는 그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카이퍼에게 의장직을 넘겨주었다. 당시 카이퍼에게는 또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는 데 메이스터 내각의 뒤를 이어 1909년 선거에서 다시 수상이 되어 이루지 못한 입법안들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8) 수상이 된 카이퍼 1901년 8월, 64세의 카이퍼 수상이 이끄는 내각이 출범했다. 1888~91년, 반혁명당과 가톨릭당의 연립정부였던 막케이 내각 이후 다시 우파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반혁명당(24석)과 가톨릭당(25석)을 주축으로 한 연립정부였다. 카이퍼는 수상직에 전념하기 위해, 자유대학 교수, 헤라우트지 편집장, 하원의원 등의 직무를 그만 두었다. 1902년 빌헬미나 여왕의 중병으로 인하여, 그 해 9월 그녀가 회복될 때까지 화란은 비상사태나 다름없었다. 국회의 입법과정이라든가 여러가지 국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여왕이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였고, 카이퍼 내각은 집권 초기부터 이런 문제로 인하여 ..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7) 각 분야에서의 헌신적 활동 1891~2년(55세) 카이퍼 박사는 다시 자유대학 총장으로 봉사했다. (1년 임기의 총장직으로, 그에게는 이번이 세번째) 그는 신학교수였지만, 그의 교수활동이 신학분야의 역할을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수많은 강의와 저술, 그리고 연설 등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헤라우트지라는 '자유발언대'가 있었다. (헤라우트지는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간지였고, 슈탄다트지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일간지였다. 모두 카이퍼가 편집장이었다.) 보다 더 일반적인 주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적 신문 논설을 통해서 대중을 깨우쳤고, 오히려 그의 많은 책들은 그 논설들을 모아 책자로 발간한 것들이었다. 1886년 카이퍼를 중심으로 국가교회에서 탈퇴하여 형성..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6) 정치지도자 카이퍼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정치 형태는 상하원이 있는 내각책임제였다. 그리고 자유당, 보수당, 카톨릭당, 반혁명당의 구도로 정당체제가 자리잡혀 있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자유당과 보수당이 주로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서로 정권을 주고받았다. 자유당과 카톨릭당, 그리고 보수당과 반혁명당이 자주 연합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립학교 등의 문제로 인하여 자유당, 보수당의 좌파와 카톨릭당, 반혁명당의 우파 간의 대립이 생겼다. 카톨릭당과 반혁명당은 서로 기독교나 정치 철학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지만, 사립학교 설립 같은 문제에 있어서 충분히 뜻을 모을 수 있었다. 1879년 11명의 의석을 차지한 반혁명당은 카이퍼의 주도적인 활동하에 점차 영향력을 ..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5) 교회 개혁을 위한 투쟁 국왕의 칙령으로 화란의 전국 신교교회가 '국가교회'로 바뀐 것은 1816년이었다. 총회가 지도하는 그 체제는, 1852년의 헌법 23조를 보완하여 1867년에 민주주의적인 방식(교회 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을 교회에 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개혁주의에서 자유주의와 그 신학으로 흘러갔다. 1880년에는 화란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4백만명)이 국가교회에 등록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교회 총회는 1883년에 목사 후보생들이 연합의 3형식(the Three Forms of Unity;하이델베르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에 따라 설교하겠노라고 하던 서약을 삭제하였다. 이에 대해 '23조'에 의해 미약하게나마 교회재판소 등에서 ..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4) 자유대학교 설립 카이퍼 박사가 신경쇠약으로 남부 유럽에서 요양을 하고서 1877년 5월 화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립학교에 대해 재정 보조를 하지 않겠다는 헤임스케르크 내각의 고등교육 법안이 입법화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 법안에는 학교에 5개 학부(교양, 신학, 법학, 의학, 자연과학부)를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사립대학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는 했다. 개혁교회들은 모더니스트들이 판치던 대학 신학부의 폐지를 주장하였지만(순수한 신학교 설립의 방편을 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하던 국회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이란 명칭을 유지한 채 '종교학'을 가르치면서도 기존의 대학에서 신학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신학과 종교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에 대한 보완책..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

신앙위인 -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 선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렘 1:5-9; 암 7:12). ‘선견자’라고도 불리는(삼상 9:9) 선지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의지나 주변 환경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자기 입장에서의 해석이나 일체의 가감없이 오직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명하신 것만을 선포해야만 했다(신 18:18; 렘 38:1-6). ​ 한편, 성경에는 단지 ‘문서 선지자’(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선지자들. 대개 B.C. 8-5세기경에 활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서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고 메시지를 이 땅에 전한 선지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시대별..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3) 본격적인 정치활동 1869년(32세) 우트레히트 중앙교회에서 비국립학교 설립 문제로 흐룬(칼빈주의적 정치노선을 지녔다.)을 처음 만난 카이퍼 박사는, 1871년 흐룬이 이끄는 반혁명당의 국회의원 후보자로 나섰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당시 정당활동에서 언론(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데 비하여 반혁명당은 그들을 지지하는 신문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1872년) 카이퍼가 주도하는 헤라우트 협회는 주간지였던 헤라우트지를 슈탄타르지라는 일간지로 재창간하였고,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언론활동을 벌였다. 1873년 그는 반혁명당의 임시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선거전을 전개하였고, 그 선거에서 반혁명당은 인상적인 결과를 얻었다. 비록 '하우다'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카이퍼가 본선거에..

기도와 눈물로 나라를 일으키신 분들

기도와 눈물로 나라를 일으키신 분들 강광범 공산당에 대항하다 6.25와 더불어 반동분자로 몰려 순교 구연영 의병출신 민족운동가, 순교자 권원호(權元浩)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한 전도사 김세환 3.1운동 48인중에 한사람 김순효 여자선교사, 한국최초 장로교 전도사 중국선교 김경종(金庚鍾) 6.25사변중 교회와 양무리를 지키다 순교 김영학(金永鶴) 독립운동으로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김유순(金裕淳) 6.25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납치 행방불명됨 김응락 6.25사변중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됨 김정준(金正俊) 신학교육과 구약학 발전에 공헌 김종우(金鐘宇) 영력의 목회자 김종한(金種漢) 6.25사변중 만경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순교함 김창식(金昌植) 한국의 사도 바울 김철훈(金哲勳) 반일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2) 교회 개혁과 정치 입문 카이퍼는 1862년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로 베이스트, 위트레히트, 암스텔담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자유주의 신학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조그마한 시골 베이스트에서 개혁주의를 맛보게 되었고, 그의 신학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867년(30세) 위트레히트라는 도시로 사역지를 옮긴 카이퍼는 드디어 '교회개혁'이라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가지각색의 신앙고백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각지역의 국가교회에서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교인들이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그의 주도적인 제안으로 위트레히트 재직회는 전체 교회(교단)에서 시행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을 거부하고, 영적인 실체를 빼놓고 일상적인 설문조사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