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7

후주(後周)의 사신

歷史 Essay 1427 ☞ 후주(後周)의 사신 당시 중국은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이어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秦) 후한(後漢) 등이 십여 년도 못되어 세워졌다 망하고 951년 후주(後周)가 들어서고 960년 조광윤(趙匡胤)에 의해 송(宋)나라가 세워지기까지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였다. 여진(女眞)과 거란(契丹)의 틈바구니에서 위협을 받던 고려는 그 마지막 주자로 고려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라를 세운 후주와 밀월관계를 맺는다. 953년 양국은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955년 후주의 왕 세종(世宗)이 즉위한다. 이 때 고려에 사신단이 오는데 그 중에 쌍기(雙冀)라는 관리가 병으로 눕게 된다. 광종(光宗)은 그가 건국 초기 후주의 태조를 도와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극진하게 대접..

광종(光宗)의 치세

歷史 Essay 1426 ☞ 광종(光宗)의 치세 태조의 넷째 아들로 925년 태어나 25세에 왕이 된 광종(光宗 925/949/975)의 치세는 정확하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모색기(摸索期)로 즉위 후 7년간이다. 그 동안 광종은 왕보다는 호족(豪族)들이 주관하는 국정을 지켜보며 힘을 모색했다. 제 2기는 왕권강화기(王權强化期)로 즉위 7년에서 11년까지인데 이 시기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 실시 등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제3기는 호족숙청기(豪族肅淸期)로 11년부터 26년 죽을 때까지였다. 15년이나 지속되는 이 시기에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여 건국 초 공신에 책봉된 인사가 2천명이었는데 정권 말기에는 백 명도 안 되었을 정도였다.

제 4대 광종(光宗)

歷史 Essay 1425 ☞ 제 4대 광종(光宗) 광종(光宗 925/949/975)은 태조와 제3비 신명왕후 유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3대 정종의 친동생이다. 26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라는 획기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관료 체계를 확립했으며 호족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 안정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왕권 강화에 몰두한 나머지 친인척도 늘 경계해 이복형인 혜종과 친형인 정종의 아들도 비명에 죽었으며 나중에 경종이 되는 외아들 주(伷)마저 의심해 가까이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철권을 휘둘렀지만 광종은 고려의 체계를 확실히 반석 위에 올려놓는 큰 업적을 남겼다.

정종(定宗)의 죽음

歷史 Essay 1424 ☞ 정종(定宗)의 죽음 정종(定宗 923/945/949)은 겉으로는 강한 척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백성들의 민심이 돌아설까 늘 조마조마했다. 고려사에는 948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사신이 보낸 말 7백필과 토산물을 점검하던 중 갑자기 천둥 번개가 몰아치자 왕이 놀라 병상에 누웠으며 백성들은 서경(西京)천도 부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며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고 한다. 결국은 병이 더욱 위중해져 다음 해인 949년 3월 재위 3년 6개월 만에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인데 한창 팔팔할 나이에 죽어서 혹시 차기 왕이 되는 동생 왕소에 의한 피살이 아닌가 의심된다.

경춘원군(慶春院君)

歷史 Essay 1423 ☞ 경춘원군(慶春院君) 경춘원군(慶春院君?-960)은 후백제 출신 승주 박씨 영규의 딸이며 견훤의 외손녀로 정종의 제2비가 된 문성왕후 박씨가 낳은 외아들이다. 태조의 제17비인 동산원부인과 정종의 제1비 문공왕후와 친자매간이니 이들은 경춘원군에게 이모가 된다. 출생년도와 생애는 기록이 없지만 949년 부왕 정종이 죽을 때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숙부인 왕소가 광종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종은 재위 11년인 960년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자신의 이복 사촌이자 혜종의 아들인 흥화군과 함께 경춘원군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정종(定宗)의 가족

歷史 Essay 1422 ☞ 정종(定宗)의 가족 정종(定宗 923/945/949)은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의 차남으로 3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 중 문공 문성 두 왕후는 자매간으로 견훤의 사위이자 전라도 지방의 세력가 박영규의 딸이다. 태조는 후백제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박영규의 딸을 17비 동산원 부인으로 맞고 다시 아들 정종의 왕비로 그녀의 여동생 둘을 며느리로 들인 것이다. 문성왕후는 경춘원군과 공주 한 명을 낳는데 왕이 될 수도 있었던 경춘원군은 960년 광종에게 죽임을 당한다. 제3비는 청주남원부인으로 그녀의 부친은 혜종의 장인인 김긍률이다. 김긍률은 혜종과 정종에게 두 딸을 바침으로서 세력을 공고히 한 것이다.

정종(定宗)의 업적

歷史 Essay 1421 ☞ 정종(定宗)의 업적 서경(西京) 천도 계획과 함께 정종(定宗 923/945/949)은 거란군의 내침을 대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하였다. 후진(後秦)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契丹)에 포로가 되어 벼슬을 하다가 사신으로 돌아온 최광윤(崔光胤)이 거란의 침입 계획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30만 대군을 관리할 능력이 안 되었으므로 각 지방 호족들을 지휘관으로 하는 일종의 예비군을 편성한 것이다. 유난히 불심이 강했던 정종은 개국사(開國寺) 등 여러 사찰을 짓고 곡식을 풀어 하사하였으며 개경파를 숙청한 죄책감으로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진흥책에도 힘썼다.

서경(西京-평양) 천도(遷都) 계획

歷史 Essay 1420 ☞ 서경(西京-평양) 천도(遷都) 계획 정종이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심에 개경(開京)의 인심이 흉흉해지자 왕식렴의 권유와 외척인 충주 세력의 지원으로 정종은 서경 천도를 계획한다. 즉위 초기부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개성의 지기가 나빠졌고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해서도 평양이 유리하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권력 투쟁으로 개경의 인심이 돌아섰음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대다수 관리들과 백성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재위 3년 947년 2월부터 시작된 서경의 궁궐 공사에 개경 사람들을 동원하자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지만 그가 죽자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최지몽(崔知夢)

歷史 Essay 1419 ☞ 최지몽(崔知夢) 낭주 최씨(朗州崔氏)의 시조 최지몽(崔知夢 907-987)은 전남 영암 출신인데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 나 고려 건국 이전에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것을 예지하여 18세에 왕건의 부름을 받았다. 고려사에서는 왕규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을 암살의 위기에서 구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없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승승장구 한 것을 보면 처세술이 좋았고 선왕 혜종을 배신하고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종과 그 일가의 추종세력인 것 같다. 광종 때 잠시 퇴출되기도 했지만 바로 복직되어 경종 대를 거쳐 성종 6년 81세로 사망하였다. 고향에는 아직도 그의 사당이 있다.

왕식렴(王式廉)

歷史 Essay 1418 ☞ 왕식렴(王式廉) 왕식렴은 태조의 숙부 왕평달(王平達)의 아들이니 고종사촌간이었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서경으로 파견돼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애초부터 후에 정종이 되는 왕자 요의 지지세력이었는데 945년 혜종이 왕규의 암살 시도에 시달리다가 죽자 요의 지원 요청으로 개경으로 쳐들어 와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을 옹립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정종 형제들과 투합해 개경으로 쳐들어 와 왕규와 혜종을 제거하고 정종을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 27년간 서경 총책으로 있으며 정종의 즉위와 함께 승승장구하다가 949년 정종이 죽기 직전에 죽었다.

신명순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歷史 Essay 1417 ☞ 신명순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신명순왕후 유씨(900-947)는 왕건의 제3비로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장남 태가 919년생인 걸 보면 왕건이 즉위하던 918년에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태는 어려서 죽는다. 945년 혜종이 어린 아들만 남기고 죽자 그녀의 아들 923년생 요가 3대 정종이 되는데 그녀는 그 후 2년 만에 48세로 죽는다. 둘째 아들 정종이 즉위 4년 만에 죽자 다시 925년생 셋째 아들 소가 4대 광종으로 즉위하니 그녀 소생 둘이 왕이 된다. 왕건의 부인 중 가장 다산으로 5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낙랑공주는 정략적으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에게 시집가 왕건이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충주 유씨(忠州劉氏)

歷史 Essay 1416 ☞ 충주 유씨(忠州劉氏) 충주 유씨는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첫 왕비 즉 신명순왕후를 배출한 호족이다. 당시 왕건은 두 명의 왕후가 있었지만 제1비 유씨는 자식이 없었고 제2비 장화왕후는 출신이 한미하고 자식도 2대 혜종 한 명뿐이었다. 943년 왕건이 죽고 권력기반이 약한 혜종이 즉위했으나 다음 해에 병을 얻자 서경 세력을 등에 업은 충주 유씨 세력은 차기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며 혜종을 압박한다. 결국 혜종이 즉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로 기록되었지만 피살로 죽자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기 왕권은 신명순왕후의 아들들로 넘어가니 왕요가 3대 정종 왕소가 4대 광종이 되는 것이다.

왕요(王堯)의 쿠데타

歷史 Essay 1415 ☞ 왕요(王堯)의 쿠데타 혜종이 즉위하면서 조정을 개경파가 장악했지만 서경파를 등에 업은 충주 유씨 세력은 막강했다. 설상가상으로 혜종이 병마에 시달리자 서경파는 개경파의 거두 박술희를 역적으로 몰아 귀양보내 죽인다. 박술희가 살해당하자 개경파가 총력전을 펼치지만 왕규에게는 군사력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945년 9월 혜종이 임종하자 서경파는 무력으로 개경파를 진압하고 왕규마저 귀양보낸 후 왕요를 왕위에 추대한다. 혜종은 오랫 동안 병상에 있으면서도 왕요를 후계자로 지목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는 아들 흥화군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니 왕요의 정종 즉위는 왕실 쿠데타였던 것이다.

서경(西京) 세력

歷史 Essay 1414 ☞ 서경(西京) 세력 태조 왕건(王建)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기에 왕성(王城)은 개경(開京)에 건설했지만 평양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당시 평양성(平壤城)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그 곳에는 여진족(女眞族)들이 살고 있었다. 왕건은 사촌동생 왕식렴(王式廉)을 보내 그들을 몰아내고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는 919년 10월 드디어 평양성을 복원하면서 서경(西京)으로 삼아 수도가 둘인 양경 정책(兩京政策)을 시행한다. 고구려 고토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성과였으나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이 개경파(開京派)와 서경파(西京派)로 갈라져 개경 세력인 혜종(惠宗)이 서경 세력을 등에 업은 충주 유씨(忠州劉氏) 소생 왕요(王堯) 왕소(王昭) 형제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제3대 정종(定宗)

歷史 Essay 1413 ☞ 제3대 정종(定宗) 정종(923/945/949)은 923년 태조와 제3비 신명순왕후 유씨(神明順王后 劉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堯)였다. 태조의 차남이지만 막강한 호족 세력인 외가 충주 유씨(忠州劉氏)의 지원을 받아 장남 혜종(惠宗)보다 훨씬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혜종 재위시 그는 야심만만한 친동생 소(昭)와 함께 서경파(西京派)와 손을 잡고 왕의 개경파(開京派)에 맞서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인다. 마침내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945년 9월 전왕의 유언도 없이 측근들의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전왕을 시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강인하고 불심이 깊었던 그도 오래 살지는 못해 재위 3년 6개월 만인 949년 3월 27세에 세상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