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7

광종의 죽음

歷史 Essay 1441 ☞ 광종의 죽음 광종(光宗)은 말년까지도 외가를 등에 업은 태자 주(伷)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호족 왕족에 대한 숙청을 계속한다. 그러나 965년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의 아버지 서필(徐弼)의 죽음 969년 6대 성종(成宗)의 아버지 왕욱(王旭)의 973년 왕사(王師) 균여(均如)의 죽음 등을 겪으며 불교를 통한 참회(懺悔)의 길을 걷는다. 궁중에서 짐승의 도살(屠殺)을 금하고 수시로 공덕제(功德祭)를 지내고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를 열었으며 1년에 4차례나 방생(放生)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죽인 데 대한 참회를 한 것이다. 25세에 왕위에 올라 많은 업적과 함께 원성을 들었던 광종은 재위 26년만인 975년 5월 지병으로 51세에 죽는다. 차기는 태자 왕..

대목왕후 황보씨

歷史 Essay 1440 ☞ 대목왕후 황보씨 대목왕후는 태조의 넷째 비 신정왕후 황보씨(903-983)의 딸이며 성종(成宗)의 아버지 대종(戴宗) 욱(旭)의 친동생이다. 외가인 황보씨(皇甫氏) 가문은 황해도 황주(黃州)의 대호족으로 본인도 그렇고 대종 욱의 딸인 천추태후(千秋太后)까지 황보씨 성을 물려줄만큼 유력 호족이었다. 광종(光宗)과는 이복남매였지만 당시 왕실의 근친혼(近親婚)은 관습이었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강력 반대한 것도 결국은 외가의 세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 광종과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5대 경종(景宗)이 되어 나중에 역시 막강한 외척 황보씨 자매를 왕후로 맞는데 그 중 헌애왕후(獻貞王后-천추태후)의 소생이 7대 목종(穆宗)이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소생이 8대..

광종의 가족

歷史 Essay 1439 ☞ 광종의 가족 광종은 왕비를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林氏) 등 둘만 두었다. 2대 혜종(惠宗)의 딸인 경화궁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고 대목왕후 황보씨는 경종(景宗)을 비롯하여 2남 3녀를 낳는다. 경종의 동생 효화태자(孝和太子)는 일찍 죽었고 세 공주 중 첫째 천추전 부인(千秋殿夫人)과 둘째 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은 당시 관습대로 왕족 중 한 명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딸은 나중에 6대 성종(成宗)의 왕비가 되는 문덕왕후 유씨(文德王后 劉氏)이다. 왕건의 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의 딸인 대목왕후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황보씨(皇甫氏)가 되었는가 하면 문덕왕후(文德王后)는 광종의 어머니 신명순왕후(神明順成王后 劉氏) 즉..

균여(均如 923-973)

歷史 Essay 1438 ☞ 균여 균여(均如 923-973)는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어머니가 누런 봉(鳳) 한쌍이 품속에 드는 꿈을 꾼 후 나이 60에 임신해 7개월 만에 낳았다. 고승일 뿐 아니라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향가(鄕歌) 시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 때 사촌형을 따라 중이 되었다. 처음 부흥사(復興寺)에서 그리고 영통사(靈通寺)에서 불도를 배웠다. 이후 명산을 찾아다니며 화엄사상(華嚴思想) 속에 법상종(法相宗)의 사상을 융합하여 교종(敎宗) 내의 대립을 해소시키고자 통합사상(統合思想)을 발전시켰다. 964년 광종(光宗)의 지원으로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의 주지가 되어 평생 불도를 전했다. 광종보다 출생도 2년 빠른 그는 광종보다 2년 빠른 973년 6월 51..

은진미륵

歷史 Essay 1437 ☞ 은진미륵 국내 최대의 석불인 은진미륵(恩津彌勒)에는 사연이 전해온다. 970년 한 여인이 반야산(般若山)에서 나물을 캐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갑자기 땅에서 커다란 돌이 솟아났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광종(光宗 925/949/975)은 그 돌로 불상(佛像)을 만들기로 하고 조각할 사람을 찾았다. 고승 혜명(慧明)이 자원하였고 그의 감독 아래 장인 100여명을 동원하여 불상 조각에 착수하였다. 작업한 지 37년 만에 완성되었는데 높이 18.12미터 둘레 9.9미터 귀의 길이 1.8미터 관의 높이 2.43미터로 국내 최대의 석불(石佛)이다. 현재 충남 논산시(論山市) 은진면(恩津面)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석불로 이것이 바로 국보 323호 은진미륵이다.

서필의 기개

歷史 Essay 1436 ☞ 서필의 기개 귀화인(歸化人)들을 중용한 나머지 광종(光宗)은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내국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대우에 반발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徐弼 901-965)이었다. 후에 거란(契丹)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江東六州)를 찾아오는 서희(徐熙)의 아버지인 그는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왕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광종이 이유를 묻자 나중에 뺏길 바에야 미리 바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광종은 분노했지만 강직한 그의 말에 그 후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 965년 서필이 죽은 이후 광종은 자신에게 죽은 많은 이들을 위해 절을 세우는 등 민심 안정책을 실시한다.

귀화인

歷史 Essay 1435 ☞ 귀화인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 시행을 주도했던 쌍기(雙冀)는 광종(光宗)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 더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어들인다. 과거제가 시행된 다음 해인 957년 쌍기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雙哲)을 불러들였고 광종은 그를 좌승(佐丞)으로 임명해 개혁작업에 동참시킨다. 쌍씨 부자가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해 고급관리로 임명받게 된다. 광종이 이렇게 귀화인들을 중용한 것은 많은 내국의 호족들이 광종의 정책에 등을 돌린 상태였으므로 호족들을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나라가 망한 후주(後周)의 관리들이 국내 호족들의 견제 세력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박수경의 죽음

歷史 Essay 1434 ☞ 박수경의 죽음 황해도 평산 박씨(平山 朴氏)를 대표하는 왕호족 수경(守卿)은 통일 전쟁시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삼국통일을 완수한 공로자였다. 그 공을 인정해 왕건(王建)은 그의 누이와 친딸 그리고 조카딸까지 셋이나 후비로 받아들인만큼 강력한 외척이었다.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식렴(王式廉)과 더불어 정종(定宗)의 집권을 후원했고 광종(光宗)의 즉위도 지원한 공신 중 공신이었다. 그런데 960년부터 광종의 숙청이 시작되면서 좌승(佐丞) 대상(大相) 등 요직에 올라 실세로 있던 세 아들이 참소에 걸려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아마 광종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것 같다. 박수경은 이 사건이 일어나자 화병에 걸려 964년 죽고 말았다.

광종의 공포정치

歷史 Essay 1433 ☞ 광종의 공포정치 호족(豪族) 숙청의 시발점은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을 역모 혐의로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두 인물이 처형당하지 않고 내쫓긴 것을 보면 참소였을 뿐인데 왕의 파격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의 불만이 팽배하자 광종(光宗 925/949/975)은 이 사건을 빌미로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호족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혜종(惠宗)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형 정종(定宗)의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마저도 역모와 관련되었다며 처형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세자로 차기 왕 경종(景宗)이 되는 주(伷)마저도 죽일 뻔 했다. 외아들이 아니었다면 분명..

호족들의 반발

歷史 Essay 1432 ☞ 호족들의 반발 당시 노비들은 대부분 고려 통일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양인(良人)으로 호족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었기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은 그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시 호족들은 고려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으로 벼슬이 세습(世襲)되었는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과거제(科擧制)는 호족들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가로막는 폭거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거센 반발이 따랐으며 심지어는 대목왕후(大穆王后)까지 나서 친정집에도 큰 타격이 되는 두 가지 개혁 정책에 거세게 반발했으나 광종(光宗)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법과 제도를 더욱 강하게 시행하였다.

과거제(科擧制)

歷史 Essay 1431 ☞ 과거제(科擧制) 907년 당(唐)이 망하고 960년 후주(後周)의 조광윤(趙匡胤)에 의해 송(宋)이 세워질 때까지 53년 동안 중국은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秦) 후한(後漢) 후주(後周)의 5대 왕조가 번갈아 들어선다. 그 중 마지막 왕조인 후주는 획기적인 개혁정책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추진하였는데 쌍기(雙冀)는 이때 고려 왕실에 발탁되어 중앙의 부서로 들어가 개혁에 직접 관여했다. 956년(광종7)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머물게 되었는데 병이 낫자 그를 만나본 광종이 후주의 허락을 받고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했다. 958년 과거제도 설치를 건의해 그로부터 천년을 이어지는 과거제도가 이해 5월 처음 실시되었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歷史 Essay 1430 ☞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광종(光宗 925/949/975) 7년인 956년 왕은 쌍기(雙冀)의 건의로 본래 양민(良民)이었다가 전쟁 등으로 노비(奴婢)가 된 사람을 해방시켜 원래대로 양민으로 올려주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행한다. 이는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노비를 해방시킴으로써 조세 수입을 늘리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재산을 빼앗긴 호족들의 저항은 물론이고 심지어 왕의 부인인 대목황후(大穆王后)도 강력히 반발하는 등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광종이 죽은 후 호족과 관료의 세력이 커지면서 성종(成宗 960/981/997) 때 다시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을 정해 해방되었던 이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렸으니 고작 30년만 시행된 셈이었다.

광종(光宗)과 쌍기(雙冀)

歷史 Essay 1429 ☞ 광종(光宗)과 쌍기(雙冀) 고려 왕권 확립에 강한 집념을 보인 임금은 4대 광종(光宗 位949-975)이었다. 광종은 초기에는 호족 출신 세력을 무마하면서 왕위의 기반을 닦았으나 쌍기(雙冀?-975)를 만나면서 강력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당시 후주 사람이던 쌍기는 956년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후주가 멸망하자 광종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중국에 있던 아버지 쌍철(雙哲)도 부르고 광종에게 높은 벼슬을 받고 밤낮으로 왕과 접견하였다. 그 결과 쌍기의 조언으로 두 가지 획기적인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다름 아닌 억울한 노비들을 풀어주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관리를 세습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는 ‘과거제도(科擧制度)’였다.

쌍기(雙冀)의 등용

歷史 Essay 1428 ☞ 쌍기(雙冀)의 등용 쌍기(雙冀?-975)는 다행히 병석에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쾌차하고 광종을 알현한다. 놀랍게도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웬만한 고려말과 풍습 등을 익혀 왕을 놀라게 했다. 광종(925/949/975)은 후주(後周) 국왕 세종에게 쌍기를 고려 조정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특별 요청을 한다. 세종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그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해 그 때부터 광종의 정계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 때가 956년 재위 7년이었다. 광종은 지난 7년 동안 정계의 흐름을 관망하며 미래를 모색하기만 했으므로 그 기간은 고려에서 가장 평화로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고려는 태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