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Leadership

교회사를 통해 본 바람직한 지도자상

Joyfule 2019. 4. 1. 00:53


 

  

     교회사를 통해 본 바람직한 지도자상   
       이양호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교회사)

 

 

4.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 칼빈

종교 개혁자 칼빈은 천상의 비밀과 자기 희생의 비밀을 깨달은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 지도자였다. 칼빈은 이렇게 내세를 강조하였다. "만약 죽음 후의 영원에 대한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부끄럽게도 야수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칼빈은 "정신은 먼저 현세 생활에 대한 경멸로 침투되지 않으면 내세를 갈망하고 사랑하도록 결코 진지하게 환기되지 않는다" 하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본성 상 이 세상에 대한 야수적 사랑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에 집착하지 않도록 가장 적절한 방법을 써서 우리를 돌리신다.

인간들이 세상에서 안일하게 평온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전쟁이나 난리나 강도나 상해를 당하게 하신다. 인간들이 세상의 덧없는 재물에 몰두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추방이나 흉작이나 화재로 가난하게 하신다. 인간들이 결혼의 즐거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우자가 탈선하고 나쁜 자녀가 나고 혹은 그들을 사별하게 하신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동시에 칼빈은 자기 부정의 삶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요는 "우리 자신의 부정"이라고 말하였다. 성서가 우리에게 자기 관심을 버리라고 명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 마음에서 소유욕, 권력욕, 인간에 대한 호의를 지우라는 것만이 아니라, 야망과 인간적 영광에 대한 모든 욕망과 다른 은밀한 잘못들도 근절하라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자기를 부정하면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갖게 된다.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도와주게 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게 한다. 우리가 자기를 부정할 때 중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자기 부정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게 한다. 하나님의 복만 바라보게 하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근대 민주주의의 어머니,"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 "근대 산업 사회의 예언자" 등등 찬란한 호칭을 얻고 있다. 우선 칼빈은 역사는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흐름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만약 우리가 인간의 정부에 대해 논의한다면 우리는 자유 국가에 사는 것이 제후 아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유 없이 명령을 내리는 제후를 가지는 것보다 선출 받아 그 직임을 수행하며 법을 준수하는 통치자를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지지할 만한 일이다"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역사는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되고 있음을 통찰하였다. 루터는 "농업을 증가시키고 상업을 감소시키는 것이 훨씬 더 경건한 일"이라고 말했으나, 칼빈은 상업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천부적 직업으로 보았으며, 상인들의 매매 활동이 건전한 사회 생활에 있어서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중세 교회는 변리를 받지 말라는 구약 성서의 말씀과 돈에는 증식성이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라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소유에서보다 상업에서 돈이 더 결실이 있지 않는가? 농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것은 합법적이고 돈을 빌려주고 그 열매를 받는 것은 불법적이란 말인가?" 하고 반문함으로써 금융업을 정당화해 주었다. 칼빈은 근면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게으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손발을 주었고 산업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할당된 짧은 삶의 시간을 볼 때 우리는 나태 속에 빈둥빈둥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 대해 "수도사들이 마치 그리스도가 사색적 생활과 활동적 생활을 비교한 것인 양 이 구절을 강조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고 중세적 해석을 비판하고 난 뒤 마르다의 잘못은 손님 접대를 위해 지나치게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는 오히려 절약과 간소한 식사를 좋아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모든 사람이 빵과 물만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부자가 빈자보다 더 잘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정도로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 빈자는 거친 빵과 검소한 식사를 하고 부자는 그의 상황에 따라서 더 잘 먹을 수 있다"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이런 점에서 당시 일부 재세례파의 '공산주의적' 사상을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몰락까지 예견하였다. "광신주의자들 때문에 이 구절[행 2:44]에 대한 건전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산의 코이노니아를 주장하는데, 그것에 의해 모든 시민적 질서가 전복된다. 이 시대에 재세례파가 소요를 일으켜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의 재산을 한 덩어리로 모아 놓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수도원의 재산의 공유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였다. "수도사들은 아무 것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들의 규칙을 지킨다고 말하는데, 그들의 뻔뻔스러움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팔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있어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그들의 게으른 배를 가난한 자들의 피로 채우며, 재산의 공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온 세상이 굶주린다 하더라도 다만 자기들은 풍만하고 사치스럽게 생활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칼빈은 산업 사회의 도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산업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 치유책을 제시하였다. 우선 칼빈은 '공산주의적' 재세례파를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을 옹호하였지만 부유한 자들의 횡포를 비난하였다. 칼빈은 마태복음 3장 9-10절에 대한 설교에서 부유한 자들이 야수처럼 가난한 자들을 삼키고 그들의 피와 양분을 빨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칼빈은 재산의 공유를 부정하는 반면, 사랑의 자선에 의해 가난한 자들의 결핍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였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가 기금이 허락하는 한,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서 풍부한 사람도 없고 결핍한 사람도 없도록 우리에게 명한다"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이에 대해 그레이엄(W. Fred Graham)은 칼빈의 사상은 "16세기 중부 유럽에 하나의 자그마한 복지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공헌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악덕 고용주를 비판하였다. "저 사람은 모든 것이 없으니 빵 한 덩이면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먹기 바쁘니 내 말을 쉽게 들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노임의 절반을 주어도 그는 만족할 것임이 틀림없다." "당신들을 위해 노력과 땀과 피를 바친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임금을 받지 못할 때… 그들이 당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복수를 구한다면 당신들이 피할 수 있도록 누가 당신들의 변호자와 옹호자가 되겠다고 나서겠는가?"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상업을 인정하였지만 부정직한 계약, 불량한 계량 기구, 매점, 매석, 독점, 폭리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칼빈은 과학과 철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천문학은 알면 즐거울 뿐만 아니라 매우 유익하기도 하다." "이 연구를 거부해서도 안 되며 또한 이 과학을 정죄해서도 안 된다." "천문학자들은 인간 정신의 지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큰 노력으로 탐구한다." 칼빈은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들이 참되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배워서 유익한 것이며, 또한 능숙한 솜씨로 수집된 것임을 인정한다" 하고 말하였다. 칼빈은 이외에도 법학, 논쟁술, 의학, 수학 등등 모든 학문적 노력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5. 결 언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람직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천상의 비밀을 체험한 자, 자기 희생을 몸소 실천한 자,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자였다. 지금 이 시대도 이런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자신이 선한 하나님의 선한 세계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부정과 부패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의로운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말만으로가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공동체를 바로 이끌어 갈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