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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Joyfule 2021. 7. 18. 21:13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그리스도인의 五확신 Lessons on Assurance

 

제 4 과  사죄의 확신


먼저 요한일서 1:9절을 암송하십시오.

요한일서 5:11~12절과 요한복음 16:24절과 고린도전서 10:13절을 계속 복습하십시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승리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로 죽으심을 믿고 죄 용서 받은 것을 자녀가 부모를 믿는 것처럼 믿을 때 승리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낳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같이 생활하면서 그대로 의심하지 않고 믿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내죄로 십자가에 죽으심도 같은 원리입니다. 내가 생활 면에 때때로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이 끝난 것입니까? 이때 사탄은 우리 마음속에 끝났다고 합니다. 너 또 죄를 지었지 않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느냐? 예수 믿는 것 포기하라고 합니다. 사탄은 권투 선수와도 같습니다. 상대편이 넘어져 있는데도 다가가서 치는 권투 선수와 같습니다. 사탄은 실상이 없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여 계속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과 교제를 끊어버리고 신앙 생활을 포기하게 합니다.


이미 죄를 지은 자에게 소망이 없다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은 너 같이 죄 지은 자 처다 보지도 관심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자체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사탄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이 때에 믿음이 사죄의 확신입니다. 나는 예수 영접하는 그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아 의롭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내 영혼은 죄 때문에 지옥 가지는 않습니다. 혹 지옥 가고 싶다 하여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에 갑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지옥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생활면에 성화 구원에 있어서 내가 진실로 회개하면 주님은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생활면에는 자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백을 성경에서는 토해내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이 토하듯이, 속에 받지 않은 음식을 먹었을 때 구역질 날 때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다 토해내고 나면 속이 시원하여 집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가 죄를 지으면 속이 편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내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계시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마음에서 죄를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죄를 짓는 것은 못먹을 것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대로 표현하면 죄는 더러운 것입니다. 돼지가 깨끗하게 씻겨 주었는데 다시 똥구덩이에 가서 뒹구는 것과 같습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토한 것이 아무리 영양분이 많다 하여도 토한 것을 다시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토해 내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영적 삶에 있어서 죄를 토해 내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고 영적인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것이 자백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즉 사죄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토해 내지 않으면 죄는 하나님과 원수이므로 교제를 막아 버리고 기도 응답과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게 합니다. 혹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었다 하여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보혈의 강이 항상 흐르도록 놓았기 때문에 자백만 하면 씻어지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면 죄사함을 받고 한단계 신앙의 발전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자백하는 자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구약에 다윗이 자백을 잘하므로 하나님이 너는 내마음에 합한자라고 하셨습니다. 사울 왕은 자백을 하지 않고 핑계와 변명만 했을 때 결국 버림을 당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의 거하심을 믿는다면 예수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녀가 부모를 믿듯이 믿는다면 마음속에 죄를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체한 자는 다른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체한것이 내려 가면 먹을 수 있듯이 자백은 영적으로 내게 큰 유익을 줍니다. 이제 버릴 것은 버리고 토해 내어야 할 것은 미련 없이 토해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사십시오. 반면에 생활면에 성화를 위해 죄와 싸우십시오.


◉ 묵 상  (요한일서 1:9)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에 대해서 당신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자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는 제일 먼저 생활면에 자백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 살아야하는데 우리 몸의 옛 습관 때문에 옛 사람으로 생활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주인으로 사는 것과 생활 속에 내 속에서 내 몸으로(입으로, 생각으로, 손으로, 발로, 나도 모르게 짓는 것이 많습니다)이런 것은 자백만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백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또 자백하는 죄는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 자백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백입니다. 자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죄를 언제든지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과 그리고 죄를 인정했으면 고백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백입니다. 솔직히 하나님 앞에 토해 내어야 합니다. 시편 62편 8절에 “마음을 토하라”고 했습니다. 자백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죄는 마음을 다 토해내는 것입니다. 구역질 나서 급할 때는 사람 의식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토해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토해 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토하라”는 것은 모두 지체 말고 하나님 앞에 토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자백”은 있는 사실 그대로 토해 내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즉시 토해야 합니다. 안에 두면 영적으로 큰 손해입니다. 기도 응답도 방해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 회개와 자백에 대한 정의


“회개”란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용서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방향 전환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회적입니다. 방향 전환을 전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죄의 길, 사망의 길에서 영생의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하여야 구원을 받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연인이 예수 믿는 것은 엄밀히 단 한번으로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 갈 수 없고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입니다. 복음을 듣고 보니 마지막 종점이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형벌인 사실을 알고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에 회개를 잘 묘사 한 누가복음 15:11~32절에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동쪽으로 가는 자가 180도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의 개념입니다.


“자백”이란 예수 믿는 신자가 생활면에 매일 수시로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미워한 것, 시기한 것, 정죄한 것, 판단한 것, 허물 들쳐낸 것, 원망한 것, 불평한 것,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 하지 않은 것, 주일성수하지 못한 것,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 것, 전도하지 못한 것, 신앙 생활에 나태한 것, 항상 기뻐하지 못한 것 등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조명하여 보면 너무 너무 자백 할 것이 많습니다. 자백하지 않는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 구원 즉 기본 구원과는 관계가 없으나 성화 구원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에 생활면에 모든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의에 세마포 옷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는 옷도 입다가 보면 더러워져 세탁을 하면 깨끗하듯이 자백하는 삶이 세마포 옷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마포 옷”이란 성도의 옳은 행실말합니다. 자백은 내속에 있는 죄를 하나 하나 토해 내면서 열거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용서 받고, 기본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방향 전환 한 것이 회개입니다. “자백의 결과”는 구원받은 후에 하는 것으로 성화면에 관계가 있습니다. 자백 할 수록 변화의 삶이 따라옵니다.


여기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사양했습니다. 절대 씻길 수 없다고 하였을 때 주님은 내가 씻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온몸을 씻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목욕한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백을 철저히 할 때 즉 다윗처럼 눈물로 베개와 침상을 적시는 자백을 할 때 풍성한 삶과 신앙의 성숙이 옵니다. 자백하지 않는 자는 생활면에 성령이 임재하여 계시지만 고아와 같습니다. 즉 지옥의 생활입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할 때 가슴이 답답합니다. 내 영혼이 답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니 신앙의 빈곤의 삶인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은밀히 마음속 깊이 숨겨 놓았을 때 큰 고통이 왔습니다. 그래서 고아와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공급을 받지 못합니다.


“회개”는 방향을 돌이켜서 내 삶을 고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 회개는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속성 자체가 변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분 그 자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즉 중생한자는 위치가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 오는 것이 상태적인 변화입니다. 즉 성화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활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 위치변화에만 치우치면 - 구원파와 같이 생활면에 죄 인정하지 않습니다.


※ 상태변화에만 치우치면 - 결과론으로 나타납니다. 살아보아야 알고, 그 때 가봐야 안다고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서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두 가지 면에서 확실할 때 구원의 확신이 있고, 사죄의 확신이 있습니다.


“회개”는 위치 변화를 갖게 합니다. 구원 즉 중생,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위치가 바뀝니다.


“자백”은 상태변화, 성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면, 미워하던 자 사랑하는 자로, 원수 맺은 자는 원수 풀고 용납하여 교재하는 자로, 술 먹던 자 술을 끊고, 담배 피우던 자 담배를 끊고, 신경질 부리던 자 신경질 안부리고, 바가지 긁던 자 바가지 긁지 않고, 외박하던자 외박하지 않고, 세상 유흥업소 가던 자 가지 않고, 교만하던 자 겸손하고, 섬김만 받으려던 자 섬기는 자로, 받기를 좋아하던 자는 주는 자로, 불순종하던 자는 순종하는 자로, 기도하지 아니하던 자는 기도하는 자로, 전도하지 않던 자는 전도하는 자로 변화가 와야 합니다. 자백을 계속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인격자로 변화됩니다. 자백하지 않으면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로, 십일조 못하면 십일조에 대한 자백을 계속하면 십일조를 하게 됩니다.


담배를 끊지 못할 때 계속 자백하면 담배를 끊게 됩니다. 자백을 하면 사죄의 확신과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되고 감사가 나오게 되고 주님을 위해 헌신이 나오게 됩니다. 자백을 계속 하다가 보면 작은 죄도 크게 보입니다. 자백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자백을 구체적으로 하십시오 자백은 지옥 안가는 것만큼 자백의 삶이 중요합니다. 제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삶인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까? 미쁘신 분입니다. 신실하고 믿을 만한 분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분야에 신실하고 믿을 만합니다. 미쁘신 분에게 자백하십시오. 의로우시고 능력과 권력을 확보하신 하나님께 자백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당신이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해 주십니까?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용서하시는데 하나님은 완전히 기억도 아니 하십니다. 지워진 공테이프처럼 여겨 주십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는 차원에서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는 면에서 사죄의 은혜를 주시면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의로우시다”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는 자격만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사죄의 권리까지 가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때에 사죄의 은혜 가운데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까지 공급하여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사죄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용서하여 주십니다. 아예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용서면에 한 단계 더 나아가 기억도 아니 하십니다. “깨끗케 하심”은 이제는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시편 103편 12절에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罪過)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 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 세계의 끝과 끝은 빛의 속도로 백억만년의 거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東)에서 서(西)로 멀리 처리하셨습니다. 동(東)과 서(西)는 영원히 만나는 기점이 없습니다. 남극과 북극은 만나는 깃 점이 있습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 “나의 영혼(靈魂)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자기 등을 보기위해 고개를 돌려보십시오. 고개와 동시에 돌아가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입니다. 도저히 볼 수 없는 개념입니다. 주님도 용서한 죄는 보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미가서 7장 19절에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발로 밟고 계십니다. 볼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발은 우주 보다 크십니다.


그 발로 밟고 있으면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 “깊은 바다”는 히말라야 산 몇개라도 들어가는 깊은 바다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볼 수 없다는 개념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할까요?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21~22). 칠은 완전 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죄하여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사죄에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백하므로 사죄를 받은 것은 보이지 않는 동(東)과 서(西)로 옮기셨고, 깊은 바다 속에 던지시고, 또 하나님의 큰 발로 밟고 계심 같이 의로운 자로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죄의 확신 안에 매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나타나는 죄를 자백하므로 상태변화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성화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죄에서 오는 축복은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녀가 부모를 믿는 것 같이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 하면…”


1. 당신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인정해야 합니까? (요한일서 1:8, 10)


요한일서 1:8, 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나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생활면에 죄를 짖고 삽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구원받은 자인데 왜 죄를 짖고삽니까? 왜 죄를 인정해야 됩니까?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위치가 변한 것이지 상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가 없다, 의롭다 인정하여 준 것 이것은 위치변화를 하나님이 선물로 준 것입니다. 지옥 형벌을 면한 것, 내 영혼이 천국을 가게 하여 준 것, 즉 기본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반면에 생활면은 상태변화는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행동으로 점진적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안 짖고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에서 구원에 이르게 되나니” 이 말은 구원 받은 자의 성화를 말합니다. 내 속에 예수 생명이 있지만 죄의 성품도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은 내 지체속에 죄의 법과 의의 법이 있어 날마다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죄의 법을 순종하면 죄를 짖고 의의 법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내 속에 새 삶이 성장하면 죄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내 속에 죄성은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위치는 변화되었지만 근본 상태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성화에서 죽으면 영화됩니다.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됩니다. 발을 씻는 것이 자백입니다. 내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짖는 것입니다. 자백하면 용서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성화 단계입니다. 죄의 법과 의의 법의 싸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