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72 - 알퐁스 도데
몽빠르나스의 어릿광대
드디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시절에 접어들었다.
그 당시에 나는 파리 근교의 어느 극장 여배우가 된 이르마 보렐과 함께
수치와 불행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던 끔찍한 나날들이 추억보다는 쓰라린 회한으로 먼저 떠오르곤 한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내 삶의 편린들이 두서없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 버려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다.
하지만 눈을 감고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는 이상하고도 구슬픈 후렴을
두서너 번 읊조리면 마치 마술에 걸린 듯 잠들어 있던 내 기억이 깨어나고
죽었던 시간들이 무덤 속을 빠져나와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몽빠르나스 가에 갓 지어진 초라한 아파트 방에 처박혀 맡은 배역을 연습하는
이르마 보렐과 끊임없이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고 노래를 불러 대는
꾸꾸블랑 사이에 끼어 살던 그 당시의 내 모습이 눈앞에 또렷이 떠오른다.
후우! 정말 끔찍하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아파트였다.
수천 개도 넘는 창문, 끈적거리는 초록색 층계, 쩍 갈라진 하수구,
일련 번호가 죽 붙여진 문짝들, 페인트 냄새를 풍기는 을씨년스런 흰 복도...
지은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그 아파트는 벌써 더럽혀져 끔찍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그 아파트에는 자그만치 방이 백팔 개나 있었다.
그리고 방마다 한 세대씩 세들어 살았다.
아파트의 겉모습만큼이나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정말 끔찍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비명소리와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아귀다툼과 볼만한 구경거리들이 연일 끊임없이 일어났다.
밤이면 밤마다 어린애들은 빽빽 울어 대고, 맨발로 타일 바닥을 걸어다니고,
아이들을 요람에 넣고 흔들어 대며 부르는 암울하고 단조로운 자장가 소리가 들려 왔다.
때때로 변화를 주려는 듯 경찰이 찾아와 한바탕 휩쓸어 지겨운 아파트의 일상을 깨곤 했다.
이르마 보렐과 내가 사랑의 도피처로 삼은 곳이 바로
그 끔찍한 소굴과도 같은 칠층짜리 아파트였던 것이다.
초라한 숙소였지만 나 같은 보잘것없는 주인에 비하면
그 아파트는 차라리 안락하고 호사스런 집이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를 택하게 된 것은 극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 서민을 위해 새로 지은 아파트들은 대부분 집세가 그리 비싸지 않았다.
회칠하는 사람의 한 달 봉급인 40프랑 정도로도
삼층에 거리 쪽으로 발코니가 있는 꽤 쓸만한 방 두 개를 구할 수 있었다.
매일 밤 연극이 끝나고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얌전한 여공들이나 바람난 처녀들, 긴 회색 외투를 걸친 경찰들이 치며 밤길을 걸어오곤 했다.
그 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차갑게 식은 고기 몇 점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꾸꾸블랑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은총을 베풀어 주던 신사는 마부와 마차, 식기, 가구를 모두 도로 가져갔다.
이르마 보렐은 꾸꾸블랑과 앵무새, 보석 몇 가지, 그리고 무대용 의상만을 갖고 왔다.
그녀가 가져온 물결무늬의 빌로드 옷들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옷자락이 치렁치렁하게 긴 의상들이었다.
방 하나는 그 의상들로 꽉 들어찼다.
그 의상들은 모두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그 의상들의 화려한 색상과 비단 주름들은
불그죽죽한 타일과 빛바랜 가구와 기이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꾸꾸블랑은 의상을 넣어 둔 그 방에서 잠을 잤다.
그 방에는 속에 짚을 넣은 싸구려 매트와 철구 그리고 생명수병 등 꾸꾸블랑의 몇 안 되는 짐이 있었다.
그녀는 불을 몹시 무서워해서 램프도 켜지 않고 어두운 방안에서만 지냈다.
밤늦게 우리가 돌아갈 때면 꾸꾸블랑은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보이는 의상들에 둘러싸여
짚을 넣어 만든 매트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녀는 마치 푸른 수염의 마법사에게
일곱 명의 교수형에 처해질 사람들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마녀 같아 보였다.
그보다는 좀 작은 또다른 방에서 나와 이르마 보렐이 앵무새와 함께 지냈다.
침대 하나, 의자 세 개, 탁자 하나, 그리고 커다란 황금색 횃대가 놓여 있는 그 방은
더이상 발 들여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우리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고 그 초라하고 좁아터진 방에 틀어박혀 뒹굴었다.
연극에 출연하는 시간 외에 우리는 방안에서 맡은 배역을 제각기 떨어져서 연습했다.
우리 둘이 연습하는 방안 모습은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내 딸, 내 딸을 돌려 줘요! 여기에요, 가스빠르! 그 이름, 그 이름, 비차--암--한!"
우리가 연극 대사를 외우느라 울부짖는 소리와 앵무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
끊임없이 읊어 대는 꾸꾸블랑의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는 노래소리로
그 좁은 방은 벽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르마 보렐, 그녀는 행복해 했다. 그녀는 이런 식의 삶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가난한 예술가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것이다.
"나는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종종 그런 말을 내뱉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비참함으로 피곤해질 때, 1리터 들이 병 포도주를 마시는 일에 싫증이 날 때,
싸구려 식당에서 배달해 오는 갈색 소스를 친 보기에도 끔찍한 식사에 싫증이 날 때,
교외의 초라한 극장에서 연극하는 일이 지긋지긋해질 때,
바로 그날 그녀는 옛날의 자신의 생활 방식을 다시 찾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아직도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들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잠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내면에 숨겨진 그러한 믿음이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녀와 나는 '어부 가스파르도'로 연극에 발을 들여놓았다.
멜로드라마치고 그 작품은 꽤 괜찮은 평을 받았으며 그녀 또한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재능 때문이라기보다 그녀의 순백색 팔과 화려한 빌로드 의상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목소리는 연극에 부적당했으며 그녀의 연기 또한 우스꽝스러웠다.
그곳의 관중은 눈부시게 이름다운 육체와 미터당 40프랑이나 하는
값비싼 의상이 만들어 내는 황홀한 전시회에 익숙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작부인이야!"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댔다.
그리고 불량기 있어 보이는 젊은이들은 귀가 터져나갈 듯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댔다.
나는 그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난장이 취급했으며, 나 자신도 관객 앞에 나서는 게 두려웠고 수치스러웠다.
나는 은밀한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읊조리곤 했다.
"더 크게 해! 안 들려! 더 크게 하라구!"
관객들은 야유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목구멍이 꽉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다.
이르마가 아무리 부탁하듯 내게 말해 보았자 허사였다.
내겐 연극적 소질이 전혀 없었다.
시 나부랑이나 끄적대는 하찮은 시인이 훌륭한 배우가 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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