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84 - 알퐁스 도데
환상의 끝
나는 아팠다. 죽어 가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씩 못 보던 마차가 쏘몽 가에 와 서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수군댔다.
"저 집 오층의 돈 많은 늙은이가 죽어 가는 모양이야...."
그러나 죽어 가는 것은 돈 많은 늙은이가 아니라 바보 나였다.
모든 의사들이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내렸다.
싸르랑드 중학교에서의 여름 방학 이후 2년 만에 나는 또다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몸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지고 정신은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내게 장티푸스란 이기기 힘든 병이었다.
'빨리! 검은 마차를 준비해! 시종장, 그대는 흑단 지팡이를 들라.
그댄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흘리겠지.'
나는 아팠다.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의식을 잃고 저승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그동안 삐에로뜨 씨의 집에선 모두 침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삐에로뜨 씨는 잠도 자지 않았으며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상심하여 내내 안절부절 못했다.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항상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을 느끼며
선행을 많이 베푼 트리부 부인은 내게 또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십사고
쌩 샤르프에게 기도를 올리며 라스파이를 한 장 한 장 탐독했고,
담홍색이 감도는 응접실에는 죽음의 그림자만 감돌 뿐,
단 한번도 피아노와 플루트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심한 비탄에 빠져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아
침부터 저녁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뜨개질을 하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삐에로뜨 씨의 집은 무거운 침묵과 흐느낌, 비통에 잠겨 모두가 우울했는데,
다만 나만이 닭털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식물처럼 누워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지각은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어떤 물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들만 윙윙거릴 뿐
사람의 말소리라고는 전혀 들려 오지 않았다.
마치 소라껍질을 귀에 대면 들려 오는
그런 먼 바닷가의 파도소리 같은 소리만이 우르릉댈 뿐이었다.
더구나 나는 말도 하지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내 모습은
소생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시들어 버린 한떨기 병든 꽃과 같았으리라.
내가 원하는 것은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거나
입 안에 얼음조각을 넣어 주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얼음조각이 다 녹아 버리거나 물수건이 불덩이 같은 이마에서 말라 버릴라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의사표시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시간을 알 수 없는 나날들,
천지가 창조되기 전 하늘과 땅이 아직도 갈라지지 않은 그런 혼돈상태의 나날들을 얼마나 헤맸을까...
아침인 것 같았다. 날씨는 맑은 듯했다.
야릇하고 모호한 느낌이 내게 서서히 찾아왔다.
마치 바다 깊숙한 곳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떴다. 말소리도 들려 왔다. 숨도 고르게 쉬었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대까지 깊이 잠들어 있던 생각하는 기계의 미세한 톱니바퀴가
서서히 깨어나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간 조금 속도가 붙고, 좀 지나서는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 부숴 버릴 기세였다.
딱! 딱! 딱! 그 신통한 기계는 잠들 것 같지 않았으며
이때까지 잃어버렸던 시간을 몽땅 보상하려는 것 같았다...
딱! 딱! 딱! 기억들이 마구 되살아나면서 비단실처럼 서로 엉켰다.
'여기가 어디지?... 이 큰 침대는 또 뭐야?...
저기 창가에 앉아 있는 세 여인은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저 검은 옷의 여인은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그래... 꼭..."
어디선가 본 듯한 그 검은 옷의 여인을 자세히 쳐다보려고
나는 팔꿈치를 침대에 괴고는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주었다.
그런데 방 한가운데에 놓인 자물쇠가 달린 큰 농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만 공포에 사로잡혀 힘이 빠져 도로 눕고 말았다...
그 농장! 꿈속에서, 무시무시한 그 꿈속에서 본 그 장농이었다.
딱! 딱! 딱! 내 머리속에 들어 있는 기계는 쏜살같이 돌아갔다...
아! 그제서야 모든 것이 기억났다.
삘르와 호텔, 자끄 형의 죽음, 장례식, 그리고 비를 맞으며 삐에로뜨 씨 집으로 왔던 일,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 내 인생의 새출발은 뼈아픈 기억의 고통으로 인한 한탄으로 시작되었다.
내 신음소리를 들었는지 저쪽 창가에 있던 세 명의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네들 중 가장 젊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얼음, 얼음!"
그녀는 재빨리 벽난로 쪽으로 가서 얼음조각을 집어서 내게 가져왔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내 눈에 보인 그녀의 손은 사람을 간호하는 데는 안 어울리는 너무 가냘픈 손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까미유!"
까미유는 다 죽어 가는 내 목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당황한 나머지
팔을 축 늘어뜨려 손에 들었던 얼음조각을 떨어뜨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안녕, 까미유! 당신을 잘 알아 볼 수 있군요!... 이젠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어요...
앗! 그런데 당신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입니까?"
까미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당신이 보이냐구요, 다니엘!... 그럼요.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잖아요!"
그때 꿈속의 장농은 환각이었으며, 까미유는 장님이 되지 않았다는 것,
그 무시무시한 꿈이 더이상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용기를 얻었다.
"내가 몹시 아팠었지요, 까미유?"
"그래요, 다니엘. 몹시 아팠어요...."
"오래 전부터 잠들어 있었나요?"
"내일이 되면 꼭 3주가 돼요...."
"세상에! 3주 동안이나!... 그럼 불쌍한 자끄 형이 죽은 지도 3주가 되었...?"
나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삐에로뜨 씨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또다른 의사를 데리고 오던 중이었다.
만일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병을 앓았다면 의학 아카데미 회원 전부가 이곳을 거쳐갈 뻔했다.
새로 온 의사는 브룸브룸이라는 유명한 의사로 성격이 호탕하고 일처리가 빠르며
환자 머리맡에서 장갑단추나 채우는 일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의사는 아니었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 맥박을 재고 눈을 까뒤집어 보고
입을 벌리게 해서 혀를 살펴보고는 삐에로뜨 씨 쪽으로 돌아섰다.
"왜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읍니까? 이 청년은 다 나았는데요...."
"아니, 뭐... 뭐라구요? 다 나았다구요!"
사람좋은 삐에로뜨 씨는 두 손을 맞잡고 뛸 듯이 기뻐했다.
"다 나았으니 이 얼음들랑 창 밖에다 내던져 버리고
환자에게 성수를 축인 닭 날개 요리를 주도록 하시오...
자 귀여운 아가씨, 이젠 상심 말아요. 일주일쯤 지나면
죽을 고비를 넘긴 이 청년은 완전히 회복되어 아주 건강해질 것이오.
내가 장담하지... 이젠 이 사람이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도록 해주시오.
충격을 주건 흥분시키지 말고, 절대 안정을 요합니다.
그 점이 제일 중요해요... 요란을 떨거나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는 겁니다.
저절로 차츰 회복되어 갈 거요. 자연의 이치는 신비한 거라오.
이제 자연의 힘에 맡겨 두는 겁니다."
유명한 의사 브룸브룸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내게는
손가락을 튕겨 보였고 까미유에게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삐에로뜨 씨는 의사를 배웅하면서도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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