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86 - 알퐁스 도데
환상의 끝 3.
다음날 나는 새벽녘부터 조심스레 삐에로뜨 씨의 동정을 살폈다.
그가 막 가게로 내려가려 할 때 그를 가만히 불렀다.
"삐에로뜨 씨, 삐에로뜨 씨."
삐에로뜨 씨는 내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 매우 흥분이 되어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삐에로뜨 씨, 전 이제 다 나았읍니다.
당신하고 진지하게 상의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제 어머니와 제게 베풀어 주신 일에 대해 감사...."
그가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아, 그런 말이라면 한마디도 하지 말게 다니엘!
난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자끄와의 약속을 지킨 것뿐이야."
"알고 있어요, 삐에로뜨 씨. 어떤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리라는 건 잘 알고 있죠...
다만, 전 또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라루트 상회의 점원 하나가 곧 나갈 거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저... 절 그 후임으로 써주시지 않으시겠냐는... 그런 부탁입니다,
삐에로뜨 씨.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세요.
알아요. 내가 비열한 행동을 했다는 것,
당신들과 함께 살 권리도, 뻔뻔스럽게 부탁할 권리도 없다는 걸 잘 알아요.
내가 이 집에 있음으로 해서 고통스러워하고,
나를 역겨워 할 사람이 한 사람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이곳엔 절대로 올라오지 않고 늘 가게에만 있겠어요.
집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마당에만 있는 개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내 할 일만 하고 지내겠다는 걸 약속드립니다.
그런 조건으로 절 받아 주실 수는 없으시겠읍니까?"
삐에로뜨 씨는 그 큰 손으로 내 곱슬머리를 부둥켜안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자제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저런! 다니엘 내 말좀 들어 봐.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딸애랑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나는 기꺼이 수락하겠지만... 딸애가 어떨지 몰라서... 그애도 일어났을 테니... 까미유! 까미유!"
꿀벌처럼 부지런한 까미유는 응접실 벽난로 위에 놓인 붉은 장미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침 실내복 차림에 머리를 중국풍으로 틀어 올려 싱싱하고 어여쁜 한 떨기 꽃같이 느껴졌다.
"얘야, 다니엘이 우리 집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싶어하는구나...
그는 혹 네가 너무 힘들어 하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는 모양인데...."
"너무 힘들다구요?"
까미유는 안색이 확 변해서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결코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모두 표현해 주는 것은 항상 그녀의 검은 눈동자.
그렇다! 깜깜한 밤처럼 심오하고 별처럼 빛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였다.
그 검은 눈동자가 불꽃 같은 정열로 "사랑! 사랑!"을 말했었고
내 마음을 그 불꽃으로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삐에로뜨 씨는 딸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둘이서들 이야기해 봐... 아마 내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는 장식장으로 가서 세벤느 지방의 전래 무도곡을 틀었다.
그리곤 우리들이 충분히 서로의 입장을 설명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다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단 세 마디밖에 나누지 못했다.
"어떻게 됐나?"
"삐에로뜨 씨, 까미유도 당신만큼이나 착한 사람이군요.
나... 나를 용서해 주었어요!"
그 순간부터 한걸음에 삼십 리를 가는 장화를 신은 것처럼 병은 빨리 회복되었다.
검은 눈동자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앞날의 계획을 세우며 나날을 보냈다.
결혼, 우리가 일으켜 세워야 할 집안, 자끄 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끄 형의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삐에로뜨 씨의 집에는 사랑이 충만했으며 저절로 푸근함이 우러나왔다.
그런 비탄과 눈물 속에서도 사랑이 꽃 필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덤에 피어나는 작고 예쁜 꽃들을 한번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빠져 내 의무를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검은 눈동자의 간호를 받으며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어서 빨리 회복되어 가게 일을 보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물론 단순히 도자기만을 파는 일에 내 관심이 집중되긴 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전에 자끄 형이 모범을 보였던 희생과 노동의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나처럼 의지가 빈약한 사람이 도자기 파는 일조차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비극배우 이르마가 말했던 것처럼 울리학원에서 청소를 하거나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야유를 받은 것 보단
내겐 도자기 파는 일이 훨씬 더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뮤즈여신에 대해선 더이상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나는 여전히 시를 좋아했지만 내 시만큼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자기 집에 999권의 '전원시'를 보관해 두기에 싫증을 느낀 출판업자가
그 책들을 쏘몽 가로 가져왔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정도로 대담했었다.
"모두 불태워 버려요."
사려깊은 삐에로뜨 씨가 대답했다.
"모두 불태운다고! 그건 절대 안 돼! 이걸 가게에다가 보관해 두고 싶은데. 쓸모가 있을 거야...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얼마 안 있어서 마다가스카르에 계란 반숙 그릇을 보내 줘야 하지.
한 영국인 선교사가 달걀을 반숙해서 먹는 것을 보더니
그쪽 지방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는 계란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더구만.
자네가 허락한다면 그 책으로 계란 반숙 그릇을 포장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서 2주일 후 내 '전원시'는 볼로를 향해 떠나갔다.
그곳에서는 파리에서 받은 냉대를 떨쳐 버리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길 충심으로 바랬다.
햇빛이 내려비치는 화창한 일요일 오후, 밖은 쌀쌀했다.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뚜렌느 지방의 백포도주를 친 굴 열두 개를 제물로 바치는 등
삐에로뜨 씨의 집안 전체가 기쁨으로 들썩였다. 모두들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날씨도 좋았고 벽난로에서는 기분좋게 불꽃이 타올랐다.
서리가 낀 창문 위로 태양은 은빛 풍경을 비춰 주고 있었다.
응접실은 그 무엇보다 충만된 사랑으로 훈훈했다.
나는 벽난로 앞에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아 눈먼 어머니의 발치에서
낮은 목소리로 까미유와 담소하고 있었다.
까미유의 얼굴은 그녀 머리에 꽂힌 붉은 장미꽃보다도 더 빨갰다.
너무 불 가까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쥐가 무언가를 갉아먹는 듯한 소리가 들리곤 했다.
라루트 영감이 한쪽 구석에 앉아 각설탕을 깨물어 먹는 소리였다.
그리고 트리부 부인이 카드놀이에 져서 건재상을 차릴 돈을 축내게 되자
아쉬운 듯 한탄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금발의 플루트 연주자는 카드놀이에서 이긴 라루트 부인이 즐거워하는 표정과
게임에서 진 트리부 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삐에로뜨 씨는 응접실의 커다란 커튼에 반쯤 가려 무엇을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창가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조그만 원탁 위에 콤파스와 연필, 자, 직각자, 중국제 잉크, 붓 같은 것을 늘어놓고
긴 플래카드에다 뭐라고 적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5분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자기의 서투른 솜씨를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드디어 삐에로뜨 씨는 일을 끝냈다.
그는 남 몰래 숨어 있던 곳에서 조용히 나와 까미유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긴 플래카드를 눈앞에 펼쳐 보이며 말했다.
"자 봐요! 연인들, 이게 뭔지 알겠어?"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오, 아빠!"
"오, 삐에로뜨 씨!"
"무슨 일이에요?... 그게 뭔데요?"
가엾은 눈먼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다.
삐에로뜨 씨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냐구요. 에세뜨 부인?...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리
가게에다 내붙일 새 간판을 써 본 것이랍니다. 자, 다니엘. 이걸 큰 소리로 읽어
보게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만."
그때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마지막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이젠 정말 어른이 되어야지.'
플래카드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크게 읽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굵은 글씨로 나의 미래가 쓰여 있었다.
도자기 크리스탈 판매
라루트 상회
에세뜨와 삐에로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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