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85 - 알퐁스 도데
환상의 끝 2.
"의사 선생님,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까미유는 이제 안정하고 더 좀 푹 자라고 했다.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가지 말아요, 까미유. 제발...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요...
어떻게 내가 이토록 큰 슬픔을 간직한 채 잠들 수 있겠어요?"
"다니엘, 자야 해요... 잠을 자야만 해요. 지금 당신에겐 안정이 필요해요.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봐요. 이제 냉정을 되찾아요.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가끔 당신을 보러 올께요.
그리고 당신이 잠들고 나면 오랫동안 당신 곁에 앉아 있겠어요."
"그, 그래요... 자겠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했다.
"한 가지만 더, 까미유!... 조금 전에 저기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은 누구예요?"
"검은 옷의 부인?"
"그래요! 검은 옷의 부인 말이에요. 당신하고 같이 창가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던
검은 옷을 입은 키 작은 부인 말이에요... 지금은 안 보이는군요...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 부인을 봤어요. 확실해요...."
"아니... 다니엘! 잘못 본 거예요... 트리부 부인과 나만이 아침부터 내내 여기에 있었어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왜 그 당신이 선행을 많이 한 부인이라고 늘 칭찬을 아끼지 않던 분 말이에요.
하지만 트리부 부인은 검은 옷을 입진 않았어요. 언제나처럼 초록색 옷을 입은 걸요.
아니에요. 이 집엔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은 없어요. 아마 꿈을 꾼 걸 거예요.
자, 이젠 가보겠어요. 푹 주무세요...."
까미유는 왜 그런지 거짓말을 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서는 정신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혼자 남았다. 하지만 깊이 잠들자 못했다.
미세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잘 돌아가고 있는 내 머리속의 기계가 떠들어 댔다.
비단실이 꼬이고 엉켰다. 나는 몽마르뜨르 풀밭에 잠들어 있는 자끄 형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서둘러 밝혀 주신 것만 같은 아름다운 불빛,
그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생각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주 조용히.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려는가 보았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까미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가지 마세요. 충격을 받으면 안 돼요. 그가 깨어나면...."
그러자 문이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닫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검은 옷자락이 문 사이에 끼어 버려
그 순간 나는 그 검은 옷의 여인을 알아보게 되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왜 절 안아 주시지 않는 거예요?"
문이 활짝 열렸다. 검은 옷의 여인이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러나 침대 쪽으로 오지 않고 방 저쪽 끝으로 가 팔을 벌리고 나를 불렀다.
"다니엘! 다니엘!"
"여기에요,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소리쳤다.
"여기에요 어머니! 왜 여기로 오시지 않고... 여기에요."
그때서야 어머니는 침대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고
떨리는 팔을 뻗쳐 자기 주위를 더듬으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내 귀여운 아가... 네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이제 더이상 네 모습을 볼 수가 없다니... 난... 난 눈이 멀어 버렸단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배게 위에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 자식 둘이 죽고, 가정은 풍지박산나고
남편과는 생이별을 하여 20여 년의 세월이 격한 후,
가엾은 어머니의 눈은 눈물로 타버린 것이 확실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설마 어머니가... 아, 꿈이라면... 그렇다.
꿈! 어쩌면 그렇게도 꿈과 현실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운명의 여신은 나를 강타하기 위해 이런 엄청난 충격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죽음을....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가 없다.
내가 죽고 나면 가엾은 어머니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세째 아들마저도 죽어 버리면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포도주 회사의 부속품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은 내던져 버려야 했던 가엾은 희생자 아버진?
포도재배장을 떠돌며 아픈 자식을 보러 올 시간도,
죽은 자식에게 꽃 한 송이 바치러 올 시간도 없는 아버지는 어찌 되겠는가?
내가 죽으면 누가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킬 것인가?
이 다음에 부모님이 노후를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은 누가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어선 안 돼!
아무리 가늘고 희미하다 해도 난 생명줄에 매달릴 거야. 온 힘을 다해서...
빨리 회복되려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지? 생각하지 않으리라.
울어서는 안 된다면 울지도 않으리라.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 뒤의 잔잔한 바다처럼 솜털 이불 가장자리의 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평온한 내 모습을 되찾는 것은 기쁨이리라.
점차 회복되어 가는 증거일 것이므로....
집안 전체가 내게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침대발치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매일매일을 보냈다.
눈이 멀었어도 어머니는 긴 대바늘을 하도 익숙해져 있어
눈이 멀지 않았을 때만큼이나 뜨개질을 잘했다.
선량한 트리부 부인도 항상 옆에 있어 주었다.
삐에로뜨 씨도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 금발의 플루트 연주까지도 하루에 너댓 번은 문안차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 두고 싶은 것은
플루트 연주자가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오는 이유는 환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사람은 바로 트리부 부인이었던 것이다.
까미유가 자신을 원하지도 않고,
자신의 플루트 연주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후부터
그 다혈질 연주자는 과부인 트리부 부인에게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트리부 부인은 삐에로뜨 씨의 딸보다는 덜 예쁘고 재산도 적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전혀 매력이 없다거나 무일푼은 아니었다.
이 환상적인 분위기의 귀부인과 함께라면 플루트 연주자의 인생 연주는
흥행에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항간에는 이미 결혼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인이 저금해 둔 돈으로 롬바르디 가에 건재상을 차리게 될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계획을 방치해 둘 수 없었기에 금발 청년은
문안 인사차 그렇게 자주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삐에로뜨 양은? 그녀에게도 다른 좋은 계획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이 집안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있었다.
단지 환자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거의 그 방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그 방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눈 먼 어머니를 식탁으로 데려가려 할 때 잠시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핑크빛 장미 같던 황홀했던 시절,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검은 눈동자가 빌로드 꽃처럼 반짝이던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린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나는 한숨을 쉬며 날아가 버린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낌새가 역력했으며 나는 서글펐다.
그러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바로 나였다.
내겐 불평 할 권리가 전혀 없다.
그렇게 깊은 슬픔과 비탄에 잠긴 생활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는 설레임은 내게 얼마나 신선한 행복감을 주었던가!
외로울 때 기대어 울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많은 위안이 되었던가.
'그래!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연연해 하지 말자. 그리고 걱정도 당분간은 하지 말아야지.
이제 나 개인만의 행복 같은 것은 염두에 두어선 안 돼.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
내일 삐에로뜨 씨에게 한번 부탁해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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