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디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가?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나겠는가? 인생의 중후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 하지 마슈, 그저 팔자니까 살아가는 것이지 , 무슨 기쁨은 무슨 개뿔 기쁨 ㅉㅉ”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투에서 인생의 고단함과 팍팍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러나 아직 30세가 채 되지 않았다면, 나름대로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기대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면 럭셔리하고 폼나는 인생을 사는 날도 올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특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크리스천이라면, 그동안 교회에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덕담과 위로, 격려와 축복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선포되었으니까, 이를 의심치 않고 있다면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꿈을 깨는 일이 도처에 있다. 먼저 당신보다 먼저 예수를 열심히 믿다가 이 땅을 떠나간 신앙의 선배의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부모나 친척, 혹은 교인들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된다. 그래도 표본의 수가 적어서 필자의 말을 믿기 어렵겠다면, 담임목사나 주변에 알게 된 목회자들의 삶을 살펴보시면 된다. 그들이 설교단상에서 선포한 대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없다면 없는 것이다. 없는 데도 있다고 우기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은 어디에서 기쁨을 찾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자.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 없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도 인생의 기쁨을 육체의 기쁨에서 찾고 있다. 육체의 기쁨이란 육체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이 술이나 담배 그리고 성적인 쾌락이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등의 화학물질은 뇌에 도파민 등의 쾌락물질을 생성해주어서 몽롱한 쾌락을 제공해준다고 한다. 성적인 쾌락은 화학물질을 통하는 것과 달리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얻어지는 쾌락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부부간의 성관계가 아니라도 음란물을 보거나 자위행위 심지어는 몰카를 통해서라도 쾌락을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종말이 가까울수록, 비도덕적이고 일탈적인 행위를 통해 감각신경의 쾌락을 높이는 각종 유흥산업이 우후죽순으로 팽창하고 있다. 이 시대는 음란의 바다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대도 문제가 심각하지만, 자녀들의 세대는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좀 더 건전한 방법도 있다. 그중의 하나가 식욕을 채우는 것이다. 식욕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본능이지만, 이 시대는 먹는 사람들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비싼 돈을 들이고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전국의 맛 집을 찾아다니거나, 자신의 재정형편을 훨씬 넘는 돈을 먹는데 사용한다면, 필시 이는 식욕을 통해 육체의 기쁨을 얻는 방법이다. 그러나 중독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죄다 육체의 쾌락의 노예가 된 것을 말한다. 상당수의 자녀들이 게임중독에 빠져 있으며, 도박중독에 빠지면 가정과 재산 그리고 인생까지 송두리째 철저하게 파괴된다. 여자들은 쇼핑중독에 빠지기 쉬우며, 일 중독자는 일에 빠져 가족이나 건강까지 돌보지 않으며, 몸 상태가 악화되는 데도 격렬한 운동을 멈추지 않는 운동중독까지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는 거라면 건전한 취미생활 정도라고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등산이나 낚시, 바둑, 각종 스포츠 등의 취미를 갖고 동호회에 가입하여 여가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자신과 뜻이 비슷하거나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이웃이나 친구 혹은 교회친구들과 자주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담소하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사람들은 삶의 즐거움을 찾으며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추구하며 더욱 생산성 있는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 중에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건전한 취미생활을 통해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동네 뒤의 산에 난 임도를 트래킹을 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쉬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런 식의 삶도 육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건전하거나 건전하지 않거나 간에, 육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심각하게 분별하며 날카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면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모든 방식에는 항상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8:1~10)
성경은 육체의 생각이나 즐거움을 포함해서, 육체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육체의 일을 생각하며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육체를 추구하는 모든 생각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콕 집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과 귀신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육체의 뜻을 따르는 자들은, 이 땅에서 귀신들의 지배를 받아 고통스럽게 살면서 생명과 영혼을 사냥당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며 교회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이런 저주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고 있는지 낱낱이 살펴보자.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나서, 서울에 올라가서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나서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주일예배를 비롯해서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아내와 함께 교회학교 교사로 10년을 넘게 봉사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신앙행위들이 기쁘지 않았다. 주일이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서 보내다가, 집에 돌아와서 파김치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예배를 드리는 기쁨이 없었고 봉사의 즐거움도 느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즐거운 시간은 맘에 맞는 교우들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심지어는 돌아가며 교우의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쁨이 맘에 맞는 교회 사람들과 같이 있는 시간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신앙생활에서 왜 기쁨을 얻지 못했을까? 그게 기이하지 않은가? 예배의식에 참석하거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목적이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자기만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 의나 자기만족이란, 자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통해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주변의 교우가 자신의 신앙에 비난을 하거나 충고를 하면 기분이 나빠져서, 자신의 노고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억울해하며 분노가 치솟는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율법주의자이며 종교주의자들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다. 그들은 성경을 통째로 외워서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를 비롯한 600여 가지의 율법을 조항들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시면서, 두루 다니며 교인 한 사람을 만나면 배나 지옥자식을 만든다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신앙행위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하며 자기만족을 채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는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방식을 들여와서 채우고 있다. 교회 안에서 직업이나 신분이 같거나, 각종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어서 친목을 도모하게 하고, 외국어나 악기, 운동을 배우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참여하게 만드는 등, 아예 교회가 구청이나 동사무소가 하는 일을 떠맡아 하고 있다. 또한 감정의 즐거움을 얻는 통로인 찬송가가 밋밋하거나 단조로워서 즐거움이 덜하니까, 드럼이나 키보드, 전자 악기를 동원하여 기교가 심한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감정의 격앙을 배가 시키고 있다. 이렇게 기교가 심한 곡조의 복음성가의 특징은 가사를 음미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음성가를 가지도 자신들의 감정을 격앙시켜서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패역하고 가증스러운 일인가? 이런 행위들은 영혼을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육체의 기쁨을 채우는 수단일 뿐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평안과 기쁨과 영혼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육체의 쾌락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더욱 갈증을 느끼며 부작용이 심하지만, 영혼의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만족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평안과 자유는 예배의식에 참석하거나 각종 희생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영혼의 기쁨은 주안에 있을 때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성령이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며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네 교회는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눌 생각이 없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는 기도와 말씀이다. 그러나 하루에 단 10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네 교회에 널려 있다. 설사 기도한다는 이들조차 하나님과 사귀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세속적인 기도를 반복할 뿐이다. 그래서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고 교회직분이 높아도 영혼은 건조하고 냉랭하며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기쁨은 주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내 영혼이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6~22)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동력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언제나 함께 해주셔야 가능하다. 설령 성령님이 들어오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전이 될 수 없다면 금세 떠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은 물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와 피터지게 싸워서 멀리 해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찾아와서 그 이름을 높여드리며 찬양하면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종으로 자처하지만, 주인을 찾아오지도 주인의 뜻에 순종하지도 않는 교인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믿음의 능력도 없고 영혼의 기쁨도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는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대하16:9)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함께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항상 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날마다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성령의 내주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고 싶어서 여기에 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이들이 바로, 양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하나님도 찾으며 육체의 생각을 따라 사는 이들이다.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콕 집어서 말하고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공경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태도 성경이 아니라 자신들이 따라는 종교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를 뿐이라고 말이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낼 선물만을 기대하고 교회마당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속내는 육체의 만족을 꾀하며 육신의 뜻을 추구하고 싶어서이다. 이들이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사람의 속내를 날카롭게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어 누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육체의 생각을 좇는 그 모든 행위를 중지하고, 오직 전심으로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서, 성령께서 당신 안에 내주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당신의 영혼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천국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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