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교회에서 도망치라.
오랫동안 무능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새로운 분위기의 예배분위기와 참신하고 감동적인 설교, 그리고 럭셔리하고 편안한 주차장과 편의시설이 있는 교회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진다. 더욱이 처음 찾아간 교회의 교인들이 방긋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면, 그 교회에 대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의 고리타분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기쁘고 생동적인 교회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최근에 급성장하는 교회 중에서 열린 예배, 열린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이 적지 않다. ‘열린’이라는 단어가 친근하고 호감을 주지 않은가? 그래서 열린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열린 예배를 추구하는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열린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교회의 전통적인 예배방식을 깨뜨리고 멀티비전, 드라마나 무용, 세속적인 곡조의 복음성가와 밴드, 간편한 복장을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교회는 영어회화나 꽃꽂이강습, 바이올린이나 타악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이전에 자유주의적 교회에서 종종 보여 왔지만, 지금은 보수주의나 복음주의를 내세우는 교회에서도 따라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교회들은 대형교회가 되는 게 목회성공이라고 여기는 담임목사의 교회성장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평가방식에 걸 맞는 예배방식을 도입하여, 여하튼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져야 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열린 예배란, 이 시대의 세속적인 문화를 도입하여 세속화되고 타락한 교회의 예배방식이다. 열린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설교는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말씀의 감동이나 은혜가 형편없다. 설교는 말씀의 깨달음을 전하기보다 예화, 간증, 시시콜콜한 세상이야기로 채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열린 교회의 설교주제로서 하나님, 죄, 심판, 회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사탄, 귀신, 믿음, 구원, 지옥 등이 들어있지 않다. 기도나 말씀에 대한 훈련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를 다녀도 성품이 거룩하게 변화하지 않으며, 믿음이 견고해지고나 영적 능력이나 영적 전쟁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교회를 기독교적 문화가 깃든 사교장으로 알고 다니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우리네 교회가 세속적이며 타성에 젖어들었고, 목회자들은 탐욕을 채우기 급급하며 교인들의 삶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기에, 영혼이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새로운 생수를 찾아 떠났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학식이 높고 지성적이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인의 영혼과 마음을 유혹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 의식와 참신한 신앙방식을 주창하는 교회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환호를 얻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미국 새들백 교회의 창시자 릭 워런 목사가 우리네 교회에 끼친 악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는 ‘목적이 이끌리는 교회를 건립하기’라는 연수회를 열면서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시키려면, 현대적 스타일의 예배로 대체하며, 복장은 평상복, 음악은 현대적, 설교는 위로하며 격려하는 성경본문을 채택하여 긍정적인 내용을 전하며, 교리적 교훈은 예배설교시간과 별도로 소그룹 모임에서 다루어지게 하도록 하며, 실용주의적 타협의 정신이 우세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에큐메니컬한 교회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편안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경멸한다. 그러나 릭 워런의 책들은 로버트 슐러, 빌 브라이트와 많은 신학교의 교수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필자가 칼럼의 초입부터 열린 예배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열린 예배가 식상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현대교회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우리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질병이 치유되고 가정이 회복되며 삶이 행복하고 영혼이 기쁘고 즐거웠다면, 굳이 다른 방식의 예배나 다른 이름을 내건 교회에 눈길이나 주었을까? 그러나 아시다시피, 복음이나 개혁, 정통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이는 기존의 교단소속의 교회가 교인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설교단상에서 입만 열면, 축복과 위로, 격려와 덕담을 쏟아부어주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인생과 지갑이 탈탈 털리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정통보수적인 교회나 열린 예배를 지향하며 참신한 신앙방식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병들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혹의 영이 교회지도자의 머리를 타고앉아 자신들의 생각을 넣어주어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모르고 이들을 추중하는 무지한 교인들의 운명은 안 봐도 비디오이다. 성령께서 필자에게 선생이 지옥에 가면 학생은 말할 것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구절로 대신하자면, 맹인이 맹인을 이끌고 가는 형국이라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 불 보듯 환하다. 그렇다면 미혹의 영은 어떤 계략으로 우리네 교회지도자와 교인들을 미혹시키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성경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통치자인 악한 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별명이 세상의 왕이자 세상의 신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대상이다. 이 영적 전쟁을 주도하는 게 바로 교회가 아닌가?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며, 사탄의 계략을 물리치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마귀의 진을 깨뜨릴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네 교회지도자들은 영적 까막눈이다. 그래서 귀신들의 정체에 무지하고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거룩한 교회에 귀신들이 범접하며 빛인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둠인 귀신들이 공격하느냐면서 선문답 같은 얘기만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귀신들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무궁무진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계략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 공격은 성공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귀신들이 주로 공격하는 계략의 초점은 육신의 생각을 추구하려고 부추기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로 변질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죄를 좋아하고 죄를 짓고 싶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죄인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선포하고 있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좋아하는 생각은 육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인간의 생각이, 성경말씀을 교묘하게 비틀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면을 쓰고 교회에 들어앉아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마귀가 어떻게 우리네 교회를 미혹시키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1. WCC
WCC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약자로서, 신앙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자들이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하는 연대모임이다. 기이하게도, 이들 집회에는 무당들의 푸닥거리도 벌어진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물 타고 있지만,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이 집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졌는지를 보면 실상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배척한 로마 가톨릭교회와 연합하고, 인간화 화해나 사회참여활동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보다 앞세우고 있다. 이들의 사상에는 인본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2. 인본주의
인본주의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이며 영어로는 humanism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인간주의이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자유의지를 통해 진정한 자기를 찾아 산다는 자기실현이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라고 주장한다. 인본주의의 태동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신본주의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권리가 훼손되고 억압받아 그 반동으로 태어났기에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며 추구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중세의 로마가톨릭의 억압과 횡포에서 비롯된 신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은연중에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왜곡된 채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사상이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왔다. 사실 성경적인 신본주의란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하시며 인간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사상이 들어와서, 인간적인 감정과 이성, 합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3.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방식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만을 받아들인다. 이와 반대의 사고방식이 기적과 이적을 믿고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기적과 이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시며, 성경은 기적으로 시작하여 기적으로 끝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우리네 교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점차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방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이란 복을 빌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희생의 강도를 더하면 축복이 더 빨리 더 풍성하게 내려온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우리네 조상의 무속신앙에서 기원되었다. 그래서 백일기도보다 천일기도가, 그냥 맹물을 떠놓고 기도하는 것보다 천만 원짜리 굿을 하는 게 더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사상은 우리네 교회에 들어와서 희생의 강도를 더하는 기도인 새벽기도나 금식기도가, 보통 집에서 하는 기도보다 효험이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과도하게 드리며, 교회조직을 지탱하는 각종 봉사, 그리고 사람들을 끌여 들어 교회의자를 채우게 하는 숫자 등으로 믿음의 척도를 잰다. 이는 희생의 강도를 높이면 축복을 더 많이 받게 된다는 기복신앙이 우리네 교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증거이다. 여기에 번영신학도 한몫하고 있다. 번영신학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게 목회에 성공한다는 목회자의 욕심을 채워주는 신학이론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복이 따라와서 성공과 번성을 할 수 있다는 신학이론이다. 번영신학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시고 제자로 삼기 원하셨지,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주변의 대형교회에서 이런 세속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는 거의 없다. 세계 최대교회라는 순복음 교회가 대표적이고, 최근 교회 세습 문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명성교회도 둘째가라면 서글퍼할 번영신학의 주창자들이다. 이 교회가 우리나라의 대형교회 1,2순위라는 게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소위 목회성공을 바라는 목회자들과 세상에서 잘되고 부자가 되고 싶은 교인들이 이루어낸 합작품이 바로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이다. 그러나 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인본주의가 교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의 일과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죄를 짓게 하는 미혹의 영의 작품이다.
4. 치유사역
성령의 은사를 받아 치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크리스천의 로망이다. 사람마다 질병이 없는 이들이 거의 없으며, 가족 중에 정신질환과 고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질병을 치유 받고 싶어서 교회에 나온 이들도 적지 않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 또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치유사역을 하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도 널려 있다.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가르치고 훈련한다는 곳에 가보면, 목회자들이 엄청나게 찾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 치유한다는 이들 중에 가짜들도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분별의 은사가 없다면, 이들에게 속아서 재산을 털리고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치유나 기이한 현상이 전혀 없다면 아무도 속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만 치유의 능력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귀신들도 치유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무당이나 타종교, 특히 불교의 기도나 참선, 힌두교의 명상, 심지어는 기독교 이단들도 자신들의 치유를 홍보하며 교세를 넓히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잘 분별하지 않는다면 영혼과 생명을 사냥당하고 말 것이다. 또한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는 비성경적인 치유방식인 내적치유가 엄청나게 퍼져 있다. 수많은 교회에서 내적치유를 하고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인들에게 이를 가르치고 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이들 내적 치유를 주장하는 자들은 인본적이고 심리적인 치유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치유 받는 것이지, 다른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를 미혹하는 치유사역자들은 세상의 방식을 교묘하게 들어와서 교회를 속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분별하는 팁을 말씀드리자면, 1. 분위기를 조장하고 조역자가 필요하면 가짜이다. 2. 선포기도를 주문하면 가짜이다. 3. 편지를 태우고 바가지를 깨뜨리고 타이어를 쳐대는 이들은 가짜이다. 4. 임파테이션, 기름부음 등도 귀신의 속임수이다.
5. 믿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모든 생각과 신앙행위
믿음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아닌가? 그러나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마치 학생이 학교에 가는 목적이 교사와 부모에게 칭찬받는 것이며, 도시락을 일찍 먹고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러 학교에 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교제할 생각도 없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뜨악한 일이 우리네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과 만나서 교제라는 수단은 기도와 말씀이다. 즉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기도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경배하며 회개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말한다. 성경이 없던 시절에 태어났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 등의 성경의 위인들은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깊고 친밀하게 교제했다. 모세로부터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다윗이나 사무엘, 다니엘 등의 성경의 위인들도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또한 하나님의 만나는 통로는 성경말씀을 통해 만나는 것이다. 이는 성경지식을 머리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가슴에 말씀이 들어와 박히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말씀이 가슴에 새긴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며, 기적과 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시는 말씀의 위력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설교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지식을 쌓아두고는 있지만, 정작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의 습관이 없어서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네 교회는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미혹의 영이 교회지도자와 교인들을 지배하고 속여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교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종교행위가 바로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이다.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미혹의 역사이다. 성경에 예배라고 번역한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절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는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만을 예배행위라고 가르치고 있는지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위의 말씀에서 번역한 헬라어 ‘라트레이아’는 제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구약의 제사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제사라는 단어 대신에 예배라는 단어로 대치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우리가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미혹의 영은 사람들이 관행적으로 만든 예배의식을 예배라는 말로 교묘하게 바꾸어 속이고 있다. 물론 일상의 삶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석하여 예배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특정한 요일과 시간에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석한다고 예배가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이런 저런 예배의식을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참석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도 없는 주일성수라는 말을 만들어서,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호도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미혹의 영이 믿음의 본질을 흐리는 대표적인 공격이다.
또 다른 미혹의 영이 믿음의 본질을 흐리는 공격이 갖가지 희생적인 신앙행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네 교회는 주일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수련회, 부흥회, 특새, 새벽기도회, 교회봉사, 전도행사, 각종 교육프로그램 등의 참석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종교행사에 참석하고 여러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다보면 항상 바쁘게 지내고 파김치가 되어, 집안 살림은 물론 자영업, 직장, 자녀, 남편 등의 가족을 돌보지 못하며, 가장 중요한 믿음의 본질인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성령께서는 필자에게, 좀비에게 조종당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쓸 만한 교인들을 소망도 기쁨도 없는 일에 몰두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로 미혹의 영이 믿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의 은사를 속여서 넣어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방언기도이다. 방언은 성령이 임재 하는 증거로서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하면 성령이 임재 하였다고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언은 성령이 아니라 귀신들이 넣어주거나 자의적으로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기도시간에 아무런 뜻이 없는 음절만 주구장창 반복하면서 기도시간을 허비하고는, 방언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만족과 자기의 의로 삼고 있다. 또한 예언, 치유, 귀신 쫓음 등의 성령의 은사도 귀신들이 속이고 있으며, 웃으면서 뒤로 자빠지고, 아말감이 금이빨로 변하고, 손바닥에 금가루가 떨어지고, 끝도 없이 히죽히죽 웃는 것을 거룩한 웃음이라고 하며, 귀신이 속이는 임파테이션 현상을 성령의 은사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드러내는 이들은 자신 안에 성령이 계심을 철썩 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믿음의 본질을 철저하게 잊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와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종교의식에 참석하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며 귀신의 속임을 성령의 은사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우리네 교회가 미혹의 영에 속아 넘어가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고 전심으로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이 없다면, 허접쓰레기 같은 종교행위만 하다가 지옥의 불길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상이 미혹의 영이 우리네 교회지도자와 교인들을 속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사람이 좋아하고 소원하는 것들을 미끼로 보여주고 속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과 자혜, 경험과 분별력으로는 이들을 이겨낼 수 없다. 미혹의 영의 공격을 분별하고 이겨내려면 성령의 들어오셔서 지혜를 주시고 보혈의 능력을 가슴에 새겨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과 동행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하는 정예용사가 될 수 있다. 이 정예용사를 양육하는 것이 우리 영성학교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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