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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의 영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은 우리네 교회

Joyfule 2019. 4. 10. 05:11



 
 

  미혹의 영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은 우리네 교회


엊그제는 네이버블로그에 올린 필자의 글을 읽고 어느 분이 질문을 해왔다. 글의 제목은 성령께서 해주신 말씀을 올린 것이었다. 참고로 그 말씀은, ‘영접기도를 하고 나서 구원을 받는 지는, 나를 보고나서야(심판대에 서고 나서야, 필자 주) 알 수 있다.’였으며, 글의 제목은 영접기도가 구원의 잣대인지에 대한 성령의 말씀이라고 붙였다. 댓글을 올린 이 분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면서 구원을 확신하였는데, 자신의 믿음에 도전하는 글을 읽으니 마음이 불안해지며 두려워져서, 이를 확인하고자 질문을 했을 것이다. 이분의 질문의 요지는,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으며 성령 충만함을 확실하게 받았는데,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냐는 투의 글이었다. 물론 영접, 구원의 확신, 성령 충만 등은 구원을 얻는 성경의 약속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짝퉁과 진짜는 겉으로 보기에 거의 똑같다. 그러나 짝퉁인지 진짜인지 분별하는 능력이 없다면 속아서 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왜 위조지폐에 속는지 아는가? 위조지폐는 진짜와 너무 똑같이 생겨서 전문가가 아니면 진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약속하는 위의 단어가 당신에게서 드러나고 있는지 분별하고 확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은 이 단어의 성경적인 의미를 말씀드리겠다.

 

1.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위에서 질문한 분은 우리네 교회에서 구원을 손쉽게 얻는다는 가르치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고 밝히면서 구원이 좁은 문처럼 느껴졌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영접기도행위와 주일성수를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게 좁은 문인가, 넓은 문인가? 영접기도에 아멘하는 게 어렵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일성수를 하는 게 어렵다고 해서 천국이 좁은 문이라고 말했을까? 주일성수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주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자 멸망이 날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일요일에 한시간짜리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게, 어떻게 구원의 잣대가 되겠는가?

 

2. 영접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우리네 교회에서는 위의 구절을 근거로 영접기도행위가 구원의 잣대라고 가르치고 있다. 영접이라는 말은 엘라본이라는 헬라어로 그 뜻은 받아들이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하면서 동의했다고 영접하는 것인가? 이 말의 의미는 평생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이자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말로 한번 뱉었다고 한다면, 천국이 어떻게 좁은 문이겠는가?

 

3.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또 다른 잣대가 바로 위의 구절이다. 그래서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구원을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시인하다라는 헬라어는 오모게레인으로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고백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살인죄를 이었다고 자백했다면, 객관적인 물증이 없더라도 살인죄로 인정된다. 자백을 증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주로 시인했다면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결단을 삶에서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 말로 한번 내뱉고 삶에서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산다면, 그게 어떻게 주인으로 고백한 것이겠는가?

 

4. 믿음의 확신

 

믿음의 확신의 주체가 누구인가? 자신인가 하나님인가? 자신이 믿었다고 여긴다면 믿는 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기적을 일으키며, 믿음의 표적이 귀신을 쫓아내고 고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드러나며, 믿는 자의 기도는 즉각 응답이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의 약속이 자신의 기도와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무효이지 않겠는가? 믿음의 확신은 자신이 확신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해주셔야 한다. 그 인정이 기적과 이적으로서 증명된다는 게 성경의 증언이다.

 

5. 성령 충만

 

또한 성령 충만을 확실하게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대부분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령 충만은 마음이 격앙된 상태에서 들뜬 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에서는 찬양집회나 부흥회 혹은 내적치유 집회 등에서, 드럼과 전자악기를 동원하여 뜨겁게 찬양하면서 감정이 격앙된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감정의 격앙이 성령 충만이 될 수 있겠는가? 성령이 누구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의 사도나 제자들처럼, 기적과 이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고질병을 고치는 성령의 능력으로 영혼을 구원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여서 성령임재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방언이 성령이 임재 하는 증거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방언이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지 귀신의 속이는 것이지, 자의적인 방언인지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미혹의 영은 성령의 어떤 은사도 속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잣대로 증명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의 주장은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판이하다. 그러므로 당신이 필자의 주장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필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증거나 변화, 능력과 열매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말로 때우는 우리네 교회와 다른 게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게 성경적인 잣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