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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가을날이면 생각나는 사람

Joyfule 2019. 3. 14. 03:01



 
    비오는 가을날이면 생각나는 사람



지금은 필자가 충주의 한적한 시골에서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기도훈련을 하는 번듯한(?) 사역을 하고 있지만,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아내와 함께 저가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던 피곤한 인생이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대전근교의 금강 수계를 찾아, 풍광이 수려한 나무그늘아래 차를 세워놓고 고단한 몸을 쉬거나 기도를 하곤 했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가끔씩 생각난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도 있으며, 충주에 온 이후로는 갈 일이 없어서 그런지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을씨년스럽게,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분들이 생각난다.

 

먼저 옥천 지수리에서 만난 명월 할머니이다. 지수리 초입에 느티나무 밑에 정부에서 정자를 지어주었기에, 무더운 여름날이면 자주 찾아가서 정자에서 낮잠을 자거나 기도처로 삼곤 했다. 그 정자 옆에는 자그마한 집이 있는데, 그 집에 사는 분이 명월 할머니였다. 나이는 80대가 조금 넘었지만 정정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 집 우물물을 얻으러 갔다가 알게 되었다. 그 할머니의 아버지는 맹인이셨다. 그래서 어릴 때 강을 건널 때 눈먼 아버지가 자신을 업고, 자신이 말로서 발 디딜 곳을 알려주면서 강을 건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어린 시절을 아스라하게 떠올리며 말해주었다. 일제강점기의 처녀시절에 집안이 가난해서 멀리 부산의 방직공장에 돈 벌러 갔는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억지결혼을 했다고 한다. 실상은 시집을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아버지가 거짓말로 위독하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해준 남편은 자신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많은 이웃집 청년이었다. 우연히 아버지가 이 청년과 술을 마시다가 딸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집을 가고 보니 남편은 술주정뱅이였다. 그러니 그 후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 할머니는 조촐한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그분의 자녀들은 경기도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다니러 간다고 했다. 소일거리는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면서 일주일에 이틀, 면사무소에서 가르쳐주는 노래공부를 하러 다니는 게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올 여름에 불현듯 생각이 나서 아내와 그곳을 찾아갔더니, 그 집을 텅 빈 채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였다. 그래서 동네이장을 찾아가서 소식을 물으니 이태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눈망울이 총총하던 분이셨는데, 못 만나고 오니 못내 아쉬웠다.

 

두 번째 생각나는 사람은, 대청호변 어부동 근처에 사는 맹인 자매인 희정이다. 그 때도 어느 마을 초입에 차를 세워두고,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러가서 쉬다가 어둑어둑 날이 저물어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땅거미가 지는 호젓한 들판에 한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서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찾아가 보았더니 중년여자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눈은 떴지만 맹인이었다. 그래서 어두워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친해져서, 그 후로도 빵을 사들고 가끔씩 그 집에 찾아갔다. 그녀의 남편도 맹인이었으며, 멀리 대구로 시집을 가서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 집에서 쫓겨나서, 지금은 친정집으로 돌아와서 오빠네 식구들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가 보고 싶어도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찾아갈 수가 없어서, 가끔씩 아들과 전화통화만 한다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맹인동생을 찾아오는 우리 부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오빠부부의 눈치가 보여서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희정이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세 번째 생각나는 분은 대청호 끝의 막지리에 사는 영자할머니였다. 그 때도 대청호 근처에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러 갔다가, 물가에 홀로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집 나온 할머니인가 의아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을 오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지리는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차로 가려면 꾸불꾸불한 비탈진 산을 하염없이 돌아서가야만 했다. 그래서 마을버스가 없고, 대신 지자체에서 운행하는 행정선이 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할머니와 헤어져서 자동차로 산길을 돌아서 그 집에 찾아가 보았다. 그 할머니의 집에 찾아가는 길은 강원도 오지를 방불케 하는 위태로운 길이었다. 중간에 다른 차와 마주치면 돌아갈 데가 없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할머니는 우리 부부의 방문에 무척이나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할머니의 집은 70년대에 시간이 정지되어있었다. 낡아빠지고 허물어지는 건넛방, 오래전에 사용되었음직한 주저앉은 가축우리도 낯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늦은 저녁밥상에 같이 나온 식기나 숟가락은 필자가 어린 시절 보아왔던 낯익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아내가 밥그릇이며 주방용품을 새 걸로 사다 드리기도 했다. 자녀들은 출가해서 대처로 나가 잘 살고 있으며, 명절이면 손자들과 들른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치된 가재도구들이 외롭게 사는 집 주인과 때 묻은 세월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시내로 나가서 자녀들과 사시지, 왜 불편하게 여기서 혼자 사시냐고 물으니까, 남편을 떠나보내고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에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필자부부가 충주로 와서 사역을 한 이후로 다시 찾아가지 못하였다. 아마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곳에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가을비가 촉촉하게 적시는 날이면, 그분들의 쓸쓸하고 허망한 인생이 생각난다. 그래서 오랜 기억을 떠올리며, 필자의 기억 한 켠에 있던 낡고 쓸쓸한 인생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