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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 - 신상래 목사

Joyfule 2014. 8. 8. 10:19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 - 신상래 목사

 

우리네 교회에서는 성령충만을 입버릇처럼 내뱉지만 정작 성령충만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면 이 역시 곤혹스러운 일일게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귀를 간질이는 말의 성찬일 뿐이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듣게 되는 빈도나 강도만큼 성령충만한 증거를 보기 어렵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느낌이다. 자신은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여기지만 정작 맨살에 속옷만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닐까?

 

평안함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처음 만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평안하느냐”였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예수님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모습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평안하냐고 묻는 광경을 상상해보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필자는 그 때 말한 평안을 유대인의 인사인 ‘샬롬’처럼 관습적인 말투로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성경 곳곳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얼마나 원하고 계신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얻고 싶은 기도목록으로 재물이나 성공을 원하지만 평안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일 것인가? 억만장자로서 호사를 누리며 진수성찬을 먹지만 마음은 전쟁터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평안이 우리의 행복한 삶에 얼마나 중요한 조건인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평안함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로서 아주 중요한 마음의 상태이다. 기도하고 나서도 평안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아직 성령이 내주하신 상태가 아니라고 보면 틀림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다.(요14:27)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적인 평안이다.

예를 들어, 튼튼한 직장, 많은 재물, 부유한 부모, 든든한 남편, 공부 잘하는 자녀, 많은 보험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들을 통해 이 땅에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건이 하나 둘 없어진다면 평안도 함께 사라진다. 재물은 항상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게 아니다.

사업이나 투자의 실패, 혹은 직장에서의 해고 등으로 재물을 얻는 통로가 사라진다면 어느새 불안과 공포, 두려움과 염려가 들어차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이 주는 평안은 생존의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평안하다. 필자는 이러한 평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필자는 10여년동안 아내와 함께 중소기업의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며 먹고살고 있다. 영업시간도 하루에 대여섯 시간 남짓이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한 삶이다. 노후대책도 전혀 없고 사역도 지지부진하다. 그렇지만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다. 평안할 이유가 전혀 없는 데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예금통장에 잔고가 전혀 없고 주어야 할 돈이 밀렸는데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시쳇말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평안하게 먹여살려주셨다는 체험적인 믿음도 근거를 제공하지만 무엇보다도 성령이 주시는 평안 때문이다. 기도가 끝나면 언제나 평안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겪어본 사람만이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방언

성령이 내주하시는 또 하나의 증거는 방언이다. 물론 방언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령이 내주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성령이 내주하시고 충만하다.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방언을 하게 되었다면 성령충만한 명확한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먼저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나온 방언인지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기도를 시작하면 방언으로 유창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성령의 열매도 없고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지도 않으며 기도의 응답도 지지부진하다는 것이다. 성령이 내주하셔서 기도를 듣고 계시다면 삶에 힘이 없고 신앙에 능력이 없는 원인을 누군가가 설명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단박에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명령대로, 오순절에 백이십명의 교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이 불의 혀처럼 갈라진 모습으로 내려와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시작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그 때는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각국 나라의 언어로 방언을 했지만, 지금은 국적을 알 수 없는 방언이 등장한 게 다른 점이다.

어째든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증거이다. 그렇지만 성령의 내주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드러나는 현상은 흔하지 않다. 대부분 어느 정도 기도에 몰입되었을 때 그분의 존재감을 알아챌 수 있다.

필자의 경우 2,30분 간절히 기도해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강하게 내주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5~10분 이내에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상투적인 기도습관이라고 보아야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의 특징은 새로운 방언으로 계속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몇 년을 똑같은 음절로 방언한다면 이 역시 자신이 지어낸 방언일 확률이 크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능력이 있냐는 것이다. 방언의 가장 큰 장점은 순식간에 성령충만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성령으로 내 안에 가득 채워졌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없다.

그래서 귀신을 쫒아낼 때나 병자를 치유할 때 등의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소원한때, 두려움이 들고 잡념이 들어 기도에 집중이 안 될 때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평상시에 기도를 방언으로 시작해서 방언으로 끝나는 경우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기도란 하나님께 내 생각과 감정은 전달하는 대화인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면 기도가 깊게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인해 방언으로 기도하더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일반 언어로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말로 기도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우리말로 기도하고 싶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현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방언이 성령 충만의 증거이기는 하지만 우리네 교회에서는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현상이 적지 않다. 특히 여럿이 기도할 때 자신의 기도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은근히 즐기는(?) 이도 많다. 그렇지만 방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므로 기도열매의 통로로 삼아야지, 자기만족이나 자신의 의를 드려내려 한다면 허망한 일이다.

 

깨달음

성경 지식과 깨달음에 대한 차이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적지 않다. 성경지식은 그냥 성경의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며, 깨달음이란 이 말씀이 바로 자신에게 한 것이라는 강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오랫동안 성경을 읽어왔거나 설교를 들었다면 성경지식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삶에 적용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강한 충격이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쿵쾅거리기도 한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폭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깨달음은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읽어도 감동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 년에 서너 권의 책을 쓸 정도로 많은 글을 써오고 있다. 지금까지 출판되지 않은 책까지 합쳐 수십 권은 족히 될 것이다. 통찰력 있는 책을 쓴다는 것은 엄청난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필자가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기도하는 시간에 깨달음을 많이 주시기 때문에 항상 노트와 필기구를 옆에 놓고 기도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든지 가방에 넣어 휴대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깨달음의 말씀을 주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예언과 다르다. 예언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영음으로 듣는데 반해, 깨달음은 자신의 적극적인 생각 속에서 나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깨달음의 주제는 미리 예측할 수 있다. 즉 어떤 문제나 분야, 주제에 대해 기도하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면 가슴이 환하게 생각나곤 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포털사이트나 방송국 홈페이지에 전문게시판을 내고 상담을 하고 있다. 밤에 집에 들어오면 잠자기 전에 인터넷을 열어 메일이나 상담을 확인하는데,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이 적지 않았다. 그러면 그 때에 답변을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아침 기도가 끝나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어느새 답변할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천 건의 상담을 해왔으니까 이런 경우가 수도 없었다. 이런 경우가 성령이 깨달음을 통해 알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크리스천이라면 대부분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응답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믿음이나 지혜도 깨달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깨달음이 전혀 없다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고 깨달음의 빈도가 적다면 성령충만의 정도가 부족하다는 보면 된다. 성령과 깊게 친밀히 기도하는 습관이 될수록 깨달음의 빈도와 깊이도 더해진다. 기도를 오래하는 사람일수록 신령한 지혜로 충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를 동반한다면 기도할 때 뿐 아니라 일상적인 일을 할 때도 깨달음이 자주 오게 된다. 수많은 성경의 위인들은 이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 뜻대로 살다가 이 땅을 떠나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예언

예언의 은사는 여러 은사 중에서 뜨거운 감자로 취급받고 있는 은사이다. 성경에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바울도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되 특히 예언의 은사를 하라고 권면했다.(고전14:1)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도 안수 때 받은 예언을 소홀치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딤전4:14) 그렇지만 우리네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낮다.

그러한 원인은 교회를 주관하는 목회자들의 시선이 차갑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그룹으로서 제사장그룹과 예언자그룹이 있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언을 받아 교인들을 가르치고 권면했다. 초대교회에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교회에서는 예언자의 위상을 찾을 수 없다.

누군가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 목회자들은 이 은사를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하거나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떠날 것을 권면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가르치는 선지자학교가 존재했고, 바울도 예언을 하게 될 때는 두세 명의 예언을 잘 분별하여 들으며 기존 예언자가 신참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제하며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했다.(고전14:29~33)

그래서 영음으로 들리는 예언이 참 예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효과적으로 교회에 활용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교회에서 예언자들을 인정하려들지 않으니 다른 예언자를 통해 통제하고 분별할 수 있는 시스템조차 전무하다.

그래서 훈련받지 못한 예언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쏟아내고 있으며, 지혜롭게 교인들에게 권면하지 못해 혼란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귀중한 예언의 은사가 작금의 교회에서 사장(死藏)되고 있어 안타깝다.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현실이 암울하더라도 예언의 은사가 사라질리 없으며 사람들이 무시하더라도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필자의 사역은 예언의 은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하나님은 아내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공유하며 필자의 사역을 도와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언의 대부분은 성경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개개인에게 주어지며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금방 알 수 있어 유용하다. 그렇지만 영음으로 들리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솎아내는 분별력과 해박한 성경의 잣대가 있어야 참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삶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미래의 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려하거나 물질적인 유익을 꾀하는 요청에는 단호한 책망으로 돌아오며 이를 반복하면 은사를 거두어 가신다. 그렇기에 예언의 은사는 요청한다고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결코 아니다. 필자의 판단에 의하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마음이 깨끗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 같다. 어째든 예언은 성령의 은사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탁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위의 성경구절은 성령의 열매라는 지칭하는 대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열매라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지는 고통스럽고 만만치 않은 과정을 통과해야한다. 성령의 열매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만큼 오랜 단련의 시간이 필요해서 일게다. 그 외에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게 또 하나있다. 그 내용이 우리가 내심 바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원하는 성령의 능력은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쫒아내는 것들은 선호하는데, 거룩한 성품으로의 변화가 성령의 열매로 지목한 것은 좀 의아한 대목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좁은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거룩한 성품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한 분으로 당신의 자녀들도 거룩해지기를 원하신다. 거룩한 성품으로 지목한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사랑과 기쁨, 평안과 인내, 선함과 신실한, 온유와 절제 같은 성품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나갈 대 얻는 행복과 형통의 필수조건들이 아닌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타고난 성품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주변에도 툭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 온순한 양같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냉정하고 까칠한 성품이 다정다감한 친절모드로 돌아섰다는 말도 듣기 어렵다.

가까운 가족을 한번 살펴보라. 밖에서라면 부족한 성품을 감출 수 있어도 집에서는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세히 관찰하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가족들도 거룩한 성품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기 어렵다. 부족한 성품에서 거룩한 성품으로의 변화가 왜 성령의 열매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성령이 내주하는 삶을 경험하게 되면 부족한 성품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듣게 된다. 공격하는 말이나 상처 주는 행동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마음 깊은 곳에서 후회스러운 감정이 들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을 무시하고 언행을 반복하면 더 자주 그리고 강도 높게 죄책감이 든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를 하면 죄책감과 후회로 기도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현상이 바로 성령의 책망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하게 되겠지만 나쁜 행동의 빈도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온유하고 친절한 성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다. 물론 성령 충만한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에 전지전능한 분으로 소개하고 있듯이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이다. 또한 그 능력을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시겠다고 약속도 하셨다.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오랜 신앙의 경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품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기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