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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신상래 목사

Joyfule 2014. 8. 10. 13:31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신상래 목사

 

 

우리는 교회에서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권면을 수도 없이 듣는다. 설교의 마무리나 인생문제의 해결책에도 언제나 기도가 빠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마나 수많은 기도회를 열고 있다. 새벽기도회를 비롯해서 저녁기도회, 금요기도회 등등 종류도 많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어떻게 기도해야하는 지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교회는 별로 없다. 그냥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는 식이다. 말하자면, 교사가 학생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만 반복하고, 정작 공부하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 경우와 흡사하다.

이 같은 현상은 목회자 자신도 기도방식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도 교회나 신학교에서 배운 게 별로 없어 가르쳐줄게 없다는 반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기도는 시간낭비이다. 그래서 수많은 기도가 하늘나라에 도달하지 못하고 공중에 사라지는 이유이기도하다.

 

하나님이 경청하는 기도의 자세

앞서 수차례 강조했듯이, 기도란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교제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려고 떼를 쓰는 행위가 아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고 주어지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 사실 하나님이 기뻐 감동하시면 이미 기도응답이 온 것과 진배가 없다. 기도가 하늘나라에 상달되었다면 입으로 소리 내어 외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이미 들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가 되었다면 더 이상의 기도가 필요 없다.

 

필자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강조하는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필자는 아내와 함께 기도 중에 하나님의 사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 때로부터 아내에게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신분을 밝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영음이 아니라 아내의 입을 통해 말소리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셨다. 그이후로 항상 성령으로부터 영음을 듣게 되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하나님의 사자라고 신분을 밝힌 영음이 들려왔다. 그 내용인즉슨 우리 부부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말을 두 번 반복하고 떠나셨다.

 

필자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 교회주변의 부정적이고 마뜩찮은 시선이 적지 않게 존재하며 자칫하면 오해받거나 공격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밝히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이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지금도 변함없이 성령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원하는 크리스천들에게 필자가 체험한 기도방식을 알게 하여 참고하게 하려는 것이다.

 

기도란 생각이 아니다.

이 무슨 말인가? 기도란 생각이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시작하면 잡념 때문에 기도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기도훈련이 필요하고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 중요하다. 필자도 처음 기도할 때에 수많은 잡념에 시달렸다. 특히 침묵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잡념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념이 들면 이내 졸음이 쏟아지고 졸다가 보면 기도가 끝나는 수순을 밟는다. 기도에 몰입할 수 없는 이유는 기도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행위라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고3 수학시간에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는데 정신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도 수업시간은 눈으로 교과서를 보고 귀로 교사의 말소리라도 듣지 않은가? 그렇지만 기도는 그런 것조차 없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시작해서 정신력으로 끝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면 기도에 몰입할 수도, 기도의 열매를 얻을 수도 없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방언기도이며 통성기도가 아닌가?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한다면 잡념이 드는 것은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방언기도는 기도의 내용을 알 수 없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데는 한계가 있고, 통성기도 역시 소리 내어 기도하고 있더라도 얼마든지 잡념이 들 수 있다. 게다가 통성기도는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침묵기도를 어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침묵기도의 방식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행하는 침묵기도는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만 내지 않을 뿐 소리 내어 기도하는 진배없다. 절대로 생각의 흐름으로 내맡겨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성대를 누르며 힘을 주어 기도하기에 목청에서 숨소리가 강하게 새어나오는 “‘쉿~~”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온몸에 힘을 주고 기도에 집중하면서 연신 거센 숨소리를 내고 있는데 어떻게 잡념이 들고 졸수 있는가? 그래서 훈련이 되지 않으면 기도가 어렵고 침묵기도는 시도하기조차 힘들다. 처음에는 짧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짧은 기도를 반복하는 데에는 잡념이 들어올 틈새가 없다.

또한 이러한 내용의 기도는 성령을 불러일으키는 최상의 기도방식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더 이상 잡념이 들지 않고 기도에 몰입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또 하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존재감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를 못하게 하는 일들이 쏟아져 나온다. 직장인들은 직장상사나 갑자기 주어지는 과도한 업무가, 전업주부이면 집안일들이나 자녀, 남편이 방해하며, 자영업자이면 사업상의 문제로 인해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이 느닷없이 생겨나곤 한다. 필자도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상담을 통해 이런 현상은 악한 영의 계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소에 너그러웠던 남편이 기도를 하러 교회에 가면 교회까지 쫓아와 못하게 하는 사건이나, 잔업이 거의 없는 직장에 새로 부임한 직장상사가 자정까지 붙잡아 놓고 업무와 회식을 강요하는 일들은 우연이라고만 보기에는 어렵다. 악한 영은 우리네 인간보다는 영적인 능력이 상당하다.

 

필자가 체험한 사탄은 면전에서 필자의 생각을 읽어내는 개인기를 보여주어 놀라게 했다. 이런 악한 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개입한다면 100% 도망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기도를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최상의 방법인 셈이기에 필사적으로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강력한 공격을 받게 된다. 악한 영의 공격 전략을 잘 알고 있다면 지혜롭게 그리고 끈기 있게 대처해나가겠지만, 이런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면 기도를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기도 중에 드는 잡념도 악한 영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 때로는 무서움이 들게 하여 기도를 못하게 하는 방법도 심심찮게 구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잡념이나 두려움이 들어오면 강력하게 사탄을 쫓아내는 기도를 시작하면, 어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현상도 경험할 수 있다. 오랫동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현상을 진리로만 받아들이는 학교교육만을 오래 받은 탓에 교회에 와서도 귀신과 사탄의 존재나 그들의 공격을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오랜 기도와 말씀의 훈련을 통해 영적 체험을 쌓아야 가능하다.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조건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믿음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라면 단팥이 빠진 붕어빵이다. 성경은 금식기도의 효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의 방법보다 금식기도가 효과가 있다는 말일까? 그건 아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나 속내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신다. 그러므로 금식기도의 방법이 다른 기도보다 효과적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금식기도의 효력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금식기도가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없다면 고픈 배를 참고 견디며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원칙은 다른 기도방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금식기도가 아니라 다른 기도에도 간절함이 들어있다면 마찬가지이다. 묵상기도이든 통성기도이든 간절함이 빠져있다면 기도가 아니라 독백일 뿐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서는 간절함이 사라진 기도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위 성경구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간절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헤롯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마저 감옥에 가두고 다음날 처형을 하려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깊은 밤에 천사가 나타나 기적적으로 사슬을 벗겨주고 옥문을 열어준 사건도 교회가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덕분이다.(행12:5) 기도를 하면 잡념이 쏟아지고 졸려 오래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간절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도훈련을 시작할 때 모든 기도를 간절히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온몸에 힘을 주고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쓴 탓에 오랜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간절히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필자가 즐겨하는 기도방식인 침묵기도는 숨을 한꺼번에 들이 쉬고 천천히 내쉬면서 간절하게 하려고 애쓴다.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게 기도하면 한 시간만 기도해도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가 빨려 들어가야 비로소 몸에 힘이 서서히 빠져 평안한 상태에서 기도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전에는 언제나 목에 힘을 주어 간절히 기도한다. 침묵기도라고 해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않을 뿐이지 통성으로 기도하는 모습과 진배없다. 그래서 목소리대신 입에서 공기가 새어나가는 소리인 ‘쉬~~잇’하는 소리가 연방 나온다. 통성으로 기도한다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게 더 쉽겠지만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어째든 통성으로 하든지 침묵으로 하든지 모든 기도를 간절히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무시(無時)로 기도하라.

무시라는 말은 무상시(無常時)의 준말로, 일정한 때가 없다는 뜻이다. 즉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는 것이 무시로 기도하는 모습이다. 필자가 처음 기도훈련을 시작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기도방식을 샅샅이 뒤졌을 때 발견한 말이 바울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게 어떻게 기도하는 모습인지 깨닫는 게 어려웠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그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는 모습이다. 정신없이 바쁜 현대인들은 기도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기도훈련을 시킬지 고민하고 있을 때, 성령이 영음으로 들려준 기도의 방식이 바로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곰씹어보다가 바울도 자신이 고안한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 알려주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으로 채우려면 하루에 최소한 두 번, 매번 한 시간 이상의 깊은 기도가 필요하다. 성경은 그것도 모자라 하루에 세 번을 요청하신다. 그렇지만 아침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퇴근해 겨우 씻고 잠자리에 드는 일들을 반복해야하는 현대인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게 일견 이해가 간다. 농경생활을 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며 상대적으로 즐기는 문화가 별로 없었기에 기도에 집중하는 환경이 가능했지만, 현대인들은 돈을 벌고 쓰는 일로 너무 바쁘게 살아가기에 기도할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우선순위를 조정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이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차선책으로 조언하는 기도방식이 무시로 기도하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기도훈련을 시작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으로 옮겼을 때가 생각난다. 너무 막막했기에, 정말 바울은 하루 종일 기도하면 살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렇지만 일단 시도해보기로 했다. 집이나 사무실에서는 조용한 공간이 허락되므로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내와 장사를 하러 나가면 기도할 장소도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사람을 만나거나 판매를 하는 등을 제외하고 나름대로 시간이 나면 자동차를 한적한 곳에 주차하고 수영용 귀속마개를 끼고 소음을 차단한 뒤 기도를 시도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푹푹 찌는 자동차 안에서 기도하는 게 어려워 공원이나 주택가의 시원한 그늘을 찾곤 한다. 정신을 온전하게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운전 중이거나 운동할 때도 기도가 가능하다.

 

그런 기도를 시작한지 10년이 넘어 이제는 완전히 습관이 들었다. 지금은 자동차에 깔판과 좌식의자를 싣고 다니며 이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내는 “아예 이참에 도를 닦으라.”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주말에도 풍광이 좋은 야외를 찾아 나서면 산골의 동네어귀마다 정자를 지어놓았다. 그곳에 깔판을 깔고 좌식의자에 앉아 기도하면 최상의 기도환경이 된다. 처음에는 흘끔흘끔 쳐다보는 주변시선에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만성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서 기차를 타는 일이 있다면 수영용 귀속마개에 수면용 안대까지 착용하고 기도를 한다. 침묵으로 기도하니까 사람들은 피곤해서 잠을 자는 줄 생각할 것이다.

 

무시로 기도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고 기도를 하는 것과 다르므로 시간이나 장소관계상 깊은 기도가 쉬지 않다. 설령 오래 기도할 수 있더라도 낮에, 그것도 소음이 심한 곳에서 기도에 몰입하는 것은 어느 정도 훈련과 습관이 된 필자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시로 기도할 때는 주로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로 채우고 있다. 이러한 기도는 내용이 단순하고 반복해서 아무리 기도해도 지루하지 않고 너무 좋다.

또한 일상의 삶에서 성령 충만하게 유지해주므로 정규적인 기도시간에도 쉽게 몰입이 가능하게 해준다. 어째든 무시로 기도하는 것은 항상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특히 기도할 시간이 넉넉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무시로 기도하는 습관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