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최후의 몇날
5. 유다의 수수께끼
그 반역의 밤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기 전에 먼저 예수를 배신한 유다에 대해 살펴 보아야겠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한사람이었으며,하나님 아들의 은혜로운 임재에 감화를 받아온 유다가 이와같이 무서운 배신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은 일반에게는 전혀 납득이 가지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유다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사탄의 화신이며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만족스러운 해답이 못된다. 이 주장은 또한 복음서 기자의 관점이나 심리학적 사실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좀더 깊이 살려 보아야겠다.
베드로나 안드레 또는 그 나머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그는 예수를 위해 가정과 친척을 버렸다. 물론 현세적 지상 왕국에 대한 희망이 그러한 결정에 작용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런 것 이상의 사실 즉 그가 예수님에게서 흡인력을 느꼈다는 사실이 있다. 갈릴리에서 온 젊은 선지자의 호소는 이 전 그의 전생에에 있어서 어떠한 것보다도 더욱 그를 감동하게 했다. 그래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따를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이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익숙한 예수님의 눈이 유다 속에서 참 사도의 자질을 찾아내었다. 여기에 천국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종종 예수님께서 유다를 그 곁에 있게 하신 것은 제자 가운데서 배신자가 생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에정 계획에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불합리할 뿐 아니라 불신앙적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은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바꾸어버리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을 비난하는 주장이다. 이것은 거룩한 설화을 엄숙한 연극 연기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열한 제자를 부른것과 꼭 같은 이유로 유다를 불러 제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며 고상한 장래가 촉망되는 한 인간을 보셨다.
물론 그는 다른 것들도,즉 그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혼잡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 모순들,빛과 어둠의 이상한 갈등 용기와 비겁,자기 헌신과 자기애등을 보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을 뿐이며 또한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서부터 그의 성도들을 모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 있어서도 이와같이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 맨 처음 제자가 되었을 때는,가능성 많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되어갔다. 그는 생의 위대한 모험에 나섰으며 그 자신 그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차츰 미묘한 변화가 그에게 찾아왔다. 마치 그것은 봄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았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전보다 편치 못했다. 다른 제자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런지 모르나 예수님은 아셨다.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 한밤중에 하신 은밀한 기도에는 유다의 이름이 괴로운 짐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유다의 태도에 생긴 변화는 제자들의 현세적 물질적 만조가 된 인기의 조류를 타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인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다에게는 이와같이 비실세적이고 꾸물거리는 방법이 이해되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조가 된 인기의 졺는 그들 모두를 행운과 굉장한 성공에로 날라다 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버릴 예수님때문에 그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은 쓰리고 억울했으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그 배신 행위의 참 동기가 무엇인가를 암시해준다. 이 동기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돈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였을까? 의 본성에 탐욕의 기질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전대의 돈을 훔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 기자중 요한은 솔직하게 그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다(요12:6).그러나 돈이 유다로 하여금 그의 선생을 팔게 한 주된 동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돈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매우 용이하게 제사장들과 더 나은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은 삼십량은 두배 또는 세배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시기심이 그 동기였을까? 이것 역시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제자들이 전부 갈릴리 출신인 반면 그만이 열두 제자중 유일한 유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가롯"이란 말은 유다의 한 동네인 [가롯출신의 사람]이란 뜻이다) 그를 외롭고 소외된 자로 만들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게 했을런지도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이 야심적인 성격의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택하여 더욱 가까이 두신 것이(막5:379:2) 마음 쓰리게 느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범죄를 시기심 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무 가볍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이 그 동기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유다는 닥아오는 재난을 내다 보았으며, 그 재난이 닥칠 때 지도자인 예수님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가도 함께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즉 예수님께서 가라앉게 될 때 다른 사람도 함께 끌려 들어가게 될 것으로 알았다. 두려워진 유다는 최악의 사태가 닥칠 때 그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길은 당국이 그들의 적을 잡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밀고자를 놓아줄 것을 바라서[공범자 밀고]의 증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이 동기를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드 퀸시](De Quincey)는 유다가 배신자 노릇을 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집권자가 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그의 선생이 자신을 내세워 왕위에 오를 기회를 하나씩 놓치고 있는 곳을 지켜 보면서, 조급해진 유다는 드디어 만일 예수님께서 스스로 행동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그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분명히 그렇게 하는 방법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는 분기하여 그의 권능을 나타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면 그의 왕국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주장이다. 그리고 만일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시 한번 역사상에 최악의 평판을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이 주장은 예수님을 우유부단하고 일을 미루는[햄릿]과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배신자 유다 대신에 [생각을 잘못한 聖者]유다를 보여주고 있으며 뿌리채 악에 물든 범죄 대신 판단상의 오류를 말하고 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단하나도 없다.이 주장은 예수님 자신이 그 제자의 행위를 정죄하신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 판단상의 오류나 지나치게 열렬한 제자의 경솔함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용서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만"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말씀할 수 밖에 없었다(막14;21).그렇다면 [듸 퀸시]의 주장도 젖혀놓을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참 동기임이 확실한 [유다의 비뚤어진 원한]이다. 그의 세속적 희망에 대한 좌절이 원한을 키웠으며 그 원한이 깊어져 증오를 변했다. 유다는 자신이 거짓된 구실에 이끌려서 기만당했으며 몇년 동안의 그의생활은 헛된 낭비였다고, 또한 예수님이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그를 절망적인 재난에 끌어 넣은 것 뿐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냐 이것을 그대로 갚아 주리라! 그는 앙갚음을 결심했다.
이 외에도 그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눈이 그를 마치 책읽듯이 꿰뚫어 그의 생각과 은밀한 성격의 불성실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것이 그의 분노와 원한을 더욱 강렬하게 했다. 그는 배반할 것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한번 이런 생각이 그 마음을 흔들 때에 유혹자 사탄의 나머지 일은 손 쉬웠다. 그 생각은 곧 확고한 의도가 되었으며 그의 영혼은 놀라운 속도로 타락해갔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나(요13:5).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도(요13:26)그를 구해내지 못했다. 그때 쯤 그는 이미 되돌릴 수 없게끔 그의 영혼을 팔아버린 후였다. 이제는 다만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날밤 공범자들과 미리 짠 신호는 어떤 악한 영이 암시한 것일까? 동산에서 유다가 그 선생으리 고함소리나 때리는 것이나 찌르는 것으로가 아니라 입맞춤으로 배반했을 때 그것은 소름끼치는 무서운 범죄의 절정이었으며, 인간의 무도함이 갈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렴치한 극에 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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