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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장. 갈보리 - 십자가의 명패

Joyfule 2007. 10. 8. 00:20

제 19 장. 갈보리

5. 십자가의 명패

목적지에 도착하자 병정들은 그들의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땅에눕혀 놓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위에 놓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들은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린 다음 땅에 파 놓은 구덩이 속에 떨어뜨렸다.

그 다음 일을 마태는 간단하나 너무나 많은 것을 암시하는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저희가 거기 앉아 그를 지키더라](마27:36). 그들은 그를 지켜 보았다. 그들은 세계를 바꾸어 놓을 사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만 하였다면 그들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영혼들의 죄 값이 지불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과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종적인 계시의 면전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사위 노름을 하면서 그 긴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는 언제나 도덕적,영적 자격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서의 기자 모두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명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죄자가 처형될 때마다 그 죄의 성질은 공중에게 계시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즉 그 죄인으로 하여금 정죄 받게 한 범죄 사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형틀에 못박아 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올려다 볼 때 무엇 때문에 그가 처형을 받게 되었는지 알도록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왕권에 대한 주장이 반역적이었으며 민중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 때문에 정죄되었다. 따라서 그의 머리 위에는 죄목으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요19:19). 그 자귀는 [빌라도]가 선택한 것이었다.우리가 그의 마음 속에 정확하게 어떤 생각이 있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칭호는 망상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 한 견습 목수에 대한 값싼 조롱이었을까? [가이사]와 맞서려고 생각했던 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돌팔매였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라기 보다는 [빌라도]가 멸시하고 굴욕 주기를 좋아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조롱 즉 [이 예수는 너희같이 가엾은 노예에게 알맞는 왕이다]라는 조롱이었을까?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의미였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명패를 읽는 유대인 제사장들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모욕에 분개하여 즉시 [빌라도]에게 들어가서 그 명패를 떼어줄 것을 탄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의 풍자로 인해 분개해하는 무리들을 보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나의 쓸 것을 썼다]라고 일축해 버렸다(요19:22). 그러나 [빌라도가]가 뜻한 것이 더 깊은 데 있을 수는 없는가? 예수님의 어떤 힘이나 위엄 또는 본래적인 신적 위엄이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았을까? 예수님의 본질적 왕권에 대한 어떤 암시나, 예수님의 믿기지 않는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이 이 행정관의 영혼 속에 떠올랐던 것은 것은 아닐까?그가 감히 그 자신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던 깊은 본능적 직관에 따라 [왕 예수]라고 쓰지는 않았을까요? 이 문제야 어떻든 간에 우리가 빠뜨리고 지나갈 수 없는 것은 명패가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의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의 의미이다.

 

물로 나이것은 군중 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확실히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느니 언제나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권의 상징을 보아왔다. 이 세 가지 언어는 세계적 언어였으며, 그 언어들은 하나의 주된 사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문화와 지식의 언어였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영역에서 왕이시라는 것을 그 명패는 말하고 있었다.

라틴어는 법률과 정치와 언어였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셨다. 히브리어는 계시 종교의 언어였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신]분이었던 것이다(계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