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35.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여자가 그에게서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
그로부터의 다정스런 말을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편에게 얻어맞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손을 놓아 주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떠나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베어 댄 풀밭 위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부름을 받고
빨려들어가듯 달아나는 리제가 가여웠다.
그 미지의 힘이 무엇인가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가엾어 보이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측은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불운한 것 같았다.
이제 버림을 받아 이렇게 혼자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러는 동안 그는 몸이 피곤한 탓인지 졸음이 왔다.
이렇게 피곤에 지쳐 보긴 처음이었다.
슬퍼할 날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가 눈을 떴을 때,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올라 따갑게 그를 내리쪼이고 있었다.
휴식은 이제 충분했다.
재빨리 일어나서 개울로 달려가 얼굴을 씻고 물을 마셨다.
수많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어제 저녁의 유희의 갖가지 장면과 귀엽고 애정에 넘친 감정이
마치 낯선 꽃향기와 같이 풍겨 왔다.
기운차게 걸어가면서 그는 그 생각을 되풀이하고 모든 것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모든 것을 되씹어 보고 그 향기를 느끼며 더듬어 보았다.
그 갈색의 여인은 얼마나 많은 꿈을 실현시켜 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봉오리를 꽃피우게 했고,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그리움을 진정시켜 주고 또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던가?
그의 눈앞에는 들판과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바싹 마른 휴간지와 어두컴컴한 숲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농가나 물방앗간, 마을이나 도시가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 대하는 낯선 세계가 광범위햐고 막막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맞이하여 그를 즐겁게 하고, 괴롭혀 줄 준비를 잔뜩 한 채....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창에서 내다보고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제 그의 방랑은 싫든 좋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전의 산책은 아니었다.
이 거대한 세계가 지금은 현실인 것이다.
그는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운명은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하늘은 그의 하늘이며, 그 날씨는 그의 날씨였다.
이 커다란 세계 안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토끼처럼, 하찮은 벌레처럼 작았으며 푸름과 무한의 세계를 향해 그는 달렸다.
여기서는 기상이나 미사나 수업이나 점심때를 알리는 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보리빵과 한 잔의 밀크와 밀가루 스프, 그것은 얼마나 매혹적인 기억이었던가!
그의 배고픔은 늑대와 같이 눈떴다.
보리밭을 지나갔다.
이삭은 절반쯤 익어 있었다.
그는 껍질을 손과 이로 벗기고 그 미끌미끌한 보리 알맹이를
부지런히 비벼 가며, 호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그러다가 개암을 발견하고 아직 새파랬지만 그것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숲이 다시 시작되었다.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섞인 전나무 숲이었다.
여기서는 월귤나무가 무수히 자라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가느다랗고 딱딱한 풀 사이로 푸른 초롱꽃이 피어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나비가 이리저리 날다가는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성녀 게노베바는 이런 숲속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성녀의 이야기가 그는 언제나 좋았다.
아, 성녀 게노베바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어쩌면 숲속에 은둔자나 암자 같은 것에 있어
백발이 성성한 노신부가 동굴이나 나무 껍질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숲속에는 숯 굽는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만 한다면 반갑게 인사를 할 텐데.
혹 도둑이라도 아무짓도 안 하겠지.
아니,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기나긴 동안을, 오늘도 내일도 며칠까지도
이 숲속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딱다구리 소리를 듣고 그놈을 잡아 보려고 했다.
딱따구리가 있는 곳을 찾아내느라고 오랫동안 애를 썼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둥지에 달라붙어서
나무를 쪼며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그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딱다구리를 불러 내어 다정스런 말을 걸어서 나무 속의 생활이나
그의 일이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가 있다면 좋을 텐데.
아, 변신을 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한가할 때 꽃이나 잎새, 나무, 사람의 머리 등
온갖 것을 스케치하며 그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서 자주 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때때로 그는 아기 하느님처럼,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생물을 만들었다.
꽃잎에는 눈이나 입을 그려 넣고
가지에서 봉오리를 내고 있는 잎새의 다발을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고
나무 위에 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자주 이런 장난을 하며 몇 시간 동안을 즐겁게 보내곤 했었다.
그는 요술을 부릴 줄도 알았다.
선을 긋고 시작된 형태가 나뭇잎이 될 것인지,
물고기의 주둥이가 될 것인지,
여우의 꼬리가 될 것인지, 사람의 눈썹이 될 것인지....
결국 자신으로서도 알지 못할 뜻밖의 형태가 되곤 했었다.
그때 조그만 널빤지 위에 장난삼아 그어진 선이 여러 형태가 되었듯이
변신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지금 생각했다.
골드문트는 하루나 아니 한 달쯤 딱다구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살면서 미끌미끌한 줄기를 높이 기어올라가
강한 주둥이로 나무 껍질을 쪼며, 꽁지깃으로 전신을 곧추세우고,
딱따구리의 말을 하며 나무 껍질 속에서 맛있는 것을 빼먹으며 살고 싶었다.
소리가 잘 울리는 나무 속에서 달콤하고 날카로운 음향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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