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36.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숲속을 지나는 동안 골드문트는 갖가지 동물들을 만났다.
덤불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여러 마리의 토끼도 보았다.
그가 가까이 가자 토끼들은 그를 쳐다보다가는
쫑긋이 귀를 세워 반대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조그만 빈터에서 기다란 뱀을 보았으나 뱀은 달아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니라 허물만 남은 뱀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살펴 보았다.
회색과 갈색의 아름다운 무늬가 들판에 이어져서 거미줄처럼 보였다.
노란 부리를 한 까만 티티새도 보였다.
그 새들은 불안에 찬 까만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다가는
바닥에 닿을 듯 나직이 떠서 날아가 버렸다.
멧새와 피리새들도 많았다.
숲 한 곳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시퍼런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위를 기다란 다리를 가진 거미가 이상한 장난에 도취되어
미친 놈처럼 뒤엉키며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진한 물색의 날개를 가진 잠자리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저녁때가 가까워졌다.
그때 그는 뭔가를 보았다. 아니,
이미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 밑에는 흐트러진 나뭇잎뿐이었다.
나뭇가지가 꺾어지고 젖은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뚜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짐승이 맹렬한 기세로 덤불을 꺾으며 돌진해 갔다.
사슴이거나 멧돼지였을 테지만 그는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서움에 떨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흥분한 탓에 그 짐승이 달려간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만물은 다시 고요해졌는데도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숲에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이곳에서 밤을 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자리를 찾고 이끼로 침상을 만들고 있는 동안,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커다란 불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딸기 같은 열매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끼 위에서 자는 것도--
그 밖에도 오두막을 짓는다거나 불을 피우는 것까지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고요한 잠에 빠진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동물들 틈에서
언제까지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건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볼 수 없고, 어느 누구와도 인사를 나눌 수가 없으며,
여자도 볼 수가 없고, 키스도, 입술과 손발이 주는
그 사랑의 유희도 즐길 수가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그런 신세가 될 몸이라면 차라리 곰이나 사슴 같은 짐승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내세의 행복을 단념하는 한이 있더라도,
수곰이 되어 암곰을 사랑하는 것도 괜찮다.
이성이나 언어 등 온갖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자 쓸쓸히 사랑도 받지 못하고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낮겠지.
이끼로 만든 침상에 누워 잠들기 전에 그는 뜻도 모를
수수께끼 같은 숲속의 온갖 이야기를 호기심과 불안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그의 친구였다.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습성에 따르고
그들과 내기를 하고 화합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간부터 그는 여우나 작은 사슴, 전나무, 그리고 노송나무와 하나가 되었다.
그들과 같이 살고 그들과 같이 대기와 태양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굶주려야 하고 그들의 손님이 되어야 했다.
이윽고 그는 잠이 들어 동물과 인간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자신이 곰이 되어 애무를 하다가 리제를 잡아먹었다.
한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는 눈을 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은 한없는 불안감에 싸이고
어지러운 마음속에서 오랜 시간을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어제도 오늘도 밤기도를 드리지 않고 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어제와 오늘 못한 기도를 합해서 두 번 저녁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그는 이상한 생각에 잠겨 숲속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숲이 주는 불안감은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쁨으로 그는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가다가 이윽고 평평한 장소를 발견했다.
가지가 전혀 없는 굵고 곧은 전나무만 자라는 곳이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잠시 걸어가고 있으려니 수도원 대성당 기둥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에 성당의 검은 현관문으로
그의 친구 나르치스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게 언제의 일이던가?
그게 정말 불과 이틀 전의 일이란 말인가?
3일째 되는 날에야 그는 겨우 숲속에서 빠져 나왔다.
반갑게도 가까운 곳에 사람이 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갈아 놓은 토지, 밀이나 귀리가 자라는 길다란 밭이랑, 초원,
그리고 멀리까지는 안 보이지만 여기저기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좁다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드문트는 밀이삭을 훑어서 씹었다.
손질된 밭들이 정답게 그를 바라보았다.
황량한 숲속에서 오랫동안 지낸 그에게는
오솔길도, 귀리도, 시든 꽃이 하얗게 매달린 깜부기도 모두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제 곧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
한참 후에야 밭이랑 옆을 지나갔다.
그곳에 십자가가 서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언덕에 불쑥 튀어나온 능선을 돌아 그늘이 많은 보리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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