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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37. - Herman Hesse.

Joyfule 2012. 10. 3. 09:22
 
  
지(知)와 사랑37.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는 황홀한 마음으로 샘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물은 나무 틈으로 해서 기다란 나무 통에 떨어지고 있었다. 
차갑고 맛있는 물을 마셨다. 
말오줌나무의 열매는 벌써 까맣게 익어 있었다. 
말오줌나무 사이에서 두세 채의 초가지붕이 솟아 있는 것을 보자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이런 그리운 정경보다도 
한결 더 깊숙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암소의 울음소리였다. 
그 암소는 반가운 환영의 인사라도 해주듯 
흐뭇하고, 따스하고, 평화로이 그 울음소리를 바람에 실어 그의 귀에 들려 주었다.
그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오두막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간 머리와 담청색의 눈을 한 조그만 사내아이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사내아이는 물이 가득 든 옹기 항아리를 놓고 흙에 물을 섞어 반죽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맨발은 벌써 반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반죽을 한 손가락 사이에서 그 진흙이 불쑥 비어져 나와 있었다. 
사내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공을 만들었다. 
소년은 턱까지 동원하여 그 진흙을 주물렀다.
 "꼬마야, 안녕."
  골드문트는 정답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웬 낯선 사람을 발견한 꼬마는 입을 크게 벌리고 
통통한 얼굴을 찌푸리고는 울상이 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골드문트는 뒤를 쫓아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매우 어둠침침해서 한낮의 햇빛 아래 있다가 
들어선 그로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지만 만일을 위해 그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대답은 없고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연신 꼬마를 달래고 있는 노인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키 작은 노파가 어둠 속에서 일어서더니 
가까이 다가와 한 손을 눈에다 대고 손님을 올려다보았다.
  "실례합니다, 할머니."
  골드문트는 소리쳤다.
  "성자들께서 당신의 선량한 얼굴에 축복을 내리시기를! 
사흘 만에 처음으로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파는 희미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시오?"
  노파는 불안스레 물었다. 
골드문트는 악수를 청하여 노파의 손을 조금 어루만져 주었다.
 "쉴 자리를 얻어서 불을 피우는 심부름이나 해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 
빵 한 조각만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뭐 급할 것은 없지만요."
  그는 벽에 붙여 놓은 긴 의자에 앉았다. 
노파는 꼬마에게 줄 빵을 한 조각 잘랐다. 
꼬마는 긴장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나 금방이라도 울며 달아날 대세를 갖추고 낯선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파는 빵을 한 조각 더 잘라서 골드문트에게 가져갔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이 은총이 있으시길!"
  "배가 고프오?"
  노파가 물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딸기로 얼마간 요기를 했으니까요."
  "우선 들어요! 어디서 왔나?"
  "마리아브론의 수도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러면 수사인가?"
  "아뇨, 학생입니다. 지금은 여행하는 중입니다."
  노파는 반은 비웃고, 반은 넋나간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름살투성이가 된 말라빠진 목을 늘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파는 그가 빵을 먹는 동안 꼬마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호기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새 소식을 알고 있수?"
  "뭐 별로.... 안젤름 신부를 아시나요?"
  "몰라. 그 사람은 왜?"
  "앓고 있습니다."
  "앓아? 죽게 됐나?"
  "모르겠어요. 다리가 상했어요. 잘 걷지 못하시거든요."
  "죽을까?"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럼,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래. 국을 끓여야겠는걸. 
나무 쪼개는 걸 좀 도와 주게."
노파는 아궁이 옆에서 꺼낸 바싹 마른 전나무 장작과 도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땔나무를 쪼갰다. 
노파는 장작을 타나 남은 불 속에 집어 넣었다. 
그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불이 붙을 때까지 
연신 불어대는 노파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파는 반듯하면서도 독특한 배열로 전나무와 죽도화나무를 차곡차곡 쌓았다.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을음으로 온통 까매진 삼발이 위에 매달아 놓은 까만 솥을 불꽃 위에서 빙빙 돌렸다.
골드문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오기도 하고 
우유 그릇에서 크림을 떠내기도 하며, 
연기가 자욱한 어둠 속에 앉아서 현란한 불꽃과 그 위로 
주름살투성이인 노파의 광대뼈 얼굴이 불빛을 받아서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판자벽 저쪽에서 암소가 죽통을 파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보리수, 샘물, 가마솥 밑에서 넘실대는 불꽃, 
암소의 되새김질, 죽통 소리, 테이블이며 긴 의자가 있는 어두컴컴한 방,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파나 그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량했으며 
평화, 인간의 온정, 고향 등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농부 할머니는 사내아이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꼬마의 이름은 쿠노인데, 가끔씩 부엌으로 들어와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겁먹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처음에처럼 울지는 않았다.
이윽고 아들과 그의 처가 들어왔다. 그들도 농부였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농부는 당장 달려들 기세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골드문트의 팔을 붙들고 
문간으로 끌고 나가 한낮의 햇빛에서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웃음을 지으며 청년의 어깨를 정답게 툭툭 치고는 식사나 함께 하자고 했다. 
그들은 곧 자리에 앉아서 자기 몫의 빵을 우유에 적셔 먹었는데 
우유가 거의 바닥이 나자 농부가 나머지를 훌쩍 마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