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38.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골드문트가 하룻밤 묵어 갈 수 없겠느냐고 하자 농부는 방이 없어서 곤란하다며
바깥에 나가면 건초더미가 있을 거라며 괜찮다면 그곳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꼬마를 옆에 안은 농부의 아낙은 이야기에는 끼여들지 않았으나
식사를 하는 동안 호기심 가득 찬 눈초리는 젊은 나그네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의 고수머리와 눈매는 처음부터 아낙의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깨끗한 그의 하얀 목과 품위 있어 보이는 매끈한 손,
그 손의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동작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나그네이긴 하지만 훌륭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정말 젊었다.
무엇보다도 아낙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반하게 한 것은 나그네의 목소리였다.
그윽하게 사랑을 구하는 듯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는 애무와도 같이 감미롭게 들렸다.
좀더 오래 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식사가 끝나자 농부는 외양간에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골드문트는 집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손을 씻고
나지막한 물통 위에 앉아서 몸을 식히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벌써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었으나,
여기서는 이제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었다.
그때 농부의 아낙이 물통을 들고 나와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오늘 밤에 멀리 가지 않을 거면 내가 먹을 것을 갖다줄게요.
저기 기다란 보리밭 뒤에 건초가 있어요.
그 건초는 내일에야 가져올 것인데 거기 있겠어요?"
그는 주근깨가 박힌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굵직한 여인의 팔이 물통을 들어올렸다.
여인이 맑고 커다란 눈에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여인에게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여인은 물이 출렁출렁 넘치는 물통을 들고 대문 안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그는 안으로 들어가 농부와 노파를 찾아 악수를 나누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연기와 그을음과 우유 냄새가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오두막은 밤이슬을 피하는 피난처이자 고향이었는데
지금은 서먹서먹한 타향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두막 건너편으로 교회가 보였다.
그 근처에는 아름다운 숲과 굵직굵직한 고목 참나무가 있었다.
밑에는 키가 작은 풀들이 나 있었다.
그는 그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굵직한 나무 줄기 사이를 하릴없이 왔다갔다 했다.
여인과의 사랑이란 묘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가르쳐 줄 때만 언어를 사용했을 뿐
다른 일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로 말하나? 눈으로? 그렇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당황한 목소리의 음향으로,
또는 피부에서 미묘하게 발산되는 냄새로 말했다.
남녀가 서로를 갈구할 때는 그것만으로도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밀어처럼 야릇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밤을 흥분에 차서 기다렸다.
그 커다란 금발의 여인은 어떠할까?
어떤 눈매와 음향과 몸매와 동작과 키스를 가지고 있을까에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리제와는 다를 것이다.
지금쯤 리제는 어디 있을까?
단정하고 까만 머리와 갈색의 살결과 짤막한 한숨을 쉬는 리제,
남편한테 얼마나 얻어맞았을까?
지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오늘 새로운 여인을 발견한 것 같이 리제도 지금쯤 새로운 애인을 발견했을까?
왜 모든 순간이 그다지도 빨리 지나갔을까?
왜 그리 아름답고 뜨겁고 기묘하게 변하고 말았나!
그것은 죄악이며 간음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런 죄악을 저지르니 차라리 맞아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벌써 두 번째의 여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의 양심은 정지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양심이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양심이 간혹 침착성을 잃고 중압감을 갖는 것은
간음이나 환락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죄의 감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죄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라고 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살아 있는 그 자체가 죄와 같은 무엇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르치스는 같은 순결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는 인간처럼 참회의 수양에 따라야 했을까?
왜 골드문트 자신 역시 어딘지 마음속에 그 죄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단 말인가?
젊고 튼튼치 못했단 말인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롭지 못했단 말인가?
여인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느낀 은밀한 즐거움은 애인인 아낙에게 주어도 좋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완전히 행복하지 못했을까?
왜 그의 젊은 행복 속으로 때때로
그 기묘한 괴로움이나 가냘픈 불안이나 무상의 애통이 들어왔을까?
그는 사색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다지도 자주 명상에 잠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지만 역시 산다는 것은 즐거웠다.
그는 풀밭에 앉아 보랏빛의 조그만 꽃을 따서는 눈 가까이에 갖다대고
조그맣고 좁은 줄기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핏줄 같은 줄이 있고 모든 것이 섬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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