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39.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여인의 태속같이 혹은 생각하는 사람의 뇌 속과 같이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고, 기쁨이 있었다.
아! 왜 인간이란 이다지 무지할까?
왜 이런 꽃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
인간끼리조차도 진실한 대화를 나누려면
거기에는 행운과 특별한 우정과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사랑이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만약 사랑이 언어를 필요로 했다면 오해와 어리석음으로 가득찼을 테지.
아, 리제의 눈, 지그시 감은 그녀의 눈,
넘쳐흐르는 환희 속에 왜 그리 애끓는 흐느낌이 있었던가!
학문이나 시의 언어로 갖가지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을 표현해 수는 없었다. 도대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와
생각하려고 하는 영원의 충동을 마음속에 쉴새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그만 식물의 잎이 줄기 둘레에서 아름답고 기묘하게 줄을 지어 있는 것을 관찰했다.
버질의 시는 아름우나 그 시구 속에는 나선형으로 가지런히 줄을 지은
이 줄기의 조그만 잎새의 반만큼의 분명함도 영리함도 없었고,
아름답거나 의미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솟아나 있었다.
이런 꽃을 단지 한 개라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고 매혹적이며 고귀하며 의미가 깊은 행위가 될까?
그러나 그런 짓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어떠한 영웅도, 황제도, 교황도, 성자도....
해가 기울자 그는 농부의 아낙이 일러준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이렇듯 한 사람의 여인이 오직 사랑만을 좇아서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었다.
여인은 빵과 베이컨 한 토막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 가져왔어요. 먹어요."
여인이 말했다.
"나중에 먹겠어요. 내가 바라는 것은 빵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얼마나 멋진 것을 가지고 왔는지 보여 줘요!"
여인은 멋진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허덕이는 입술, 반짝이는 이, 햇빛에 그을려서 붉지만 튼튼한 팔,
그리고 목 아래로 보이는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
여자는 언어로 기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간장을 녹이는 야릇한 가락을 토해 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보드랍고 애정과 감정이 담뿍 어린 두 손이 자기 몸에 닿자
여인의 살결은 소름이 돋으며 목젖으로는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성희는 리제보다는 서툴렀지만 힘차게 애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사랑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탐욕스러웠다.
골드문트는 만족스러웠다.
이윽고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돌아갔다.
뿌치치고 떠나가는 것이 괴로웠지만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골드문트는 한동안 혼자 남았다.
행복에 도취되고 슬픔에 잠겨 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빵과 베이컨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라 그것을 먹어치웠다.
벌써 밤은 이슥해졌다.
8
골드문트의 방랑은 계속되었다.
어느 한 곳에서 이틀 밤 이상 머무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으며
도처에서 여인들의 환영을 받고 행복에 젖었다.
그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러 갈색이 되고, 방랑과 거친 음식 때문에 수척해졌다.
수많은 여자들이 이른 아침에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떠났다.
어떤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곤 했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나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한 여자도 내 곁에 머무르지 않는가? 나를 사랑해서 간통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그 여자들은 왜 모두가 매맞는 것을 염려하면서도 남편에게로 이내 돌아가는 걸까?'
그를 진심으로 붙드는 여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방랑의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각오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골드문트가 그렇게 하자고 유혹하거나
어떤 여인에게도 그런 생각을 갖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도 자유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여자의 품에 안기었을 때
이미 어제의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여자들의 사랑은
그 자신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헛되다는 것,
그리고 여인들이 불꽃처럼 열렬히 타오르다가 곧 식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그는 얼마쯤 의아해하기도 했고, 약간 슬퍼하기도 했다.
그것은 옳은 일인가?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나?
여자들이 그를 탐내어 감미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건초나 이끼 위에서 짧은 순간의 말없는 교제를 원할 뿐,
그와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토록 운명이 정해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가 방랑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인가?
정확하고 있는 사람은 유랑자의 생활에 공포감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자에게서 배우는 성희가 싫증나지 않았다.
물론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없는 나이 어린 처녀들에게 마음이 끌렸고,
또 열렬히 사랑했으나 대개의 경우 애인이 있는 수줍은 처녀한테는 손이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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