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눈물이 없이는 성령의 내주는 없다.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되어 기독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까닭이다. 그런데 이 평양대부흥운동 이전인 1901년 원산에서부터 이미 부흥운동의 불씨가 지펴지고 있었다. 이 기간을 통칭 원산대부흥운동 기간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영적각성운동이었다. 1903년 8월 하디의 공개적 회개는 당시 부흥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하디는 토론토 의과대학 교수였던 애비슨(O. A. Avison)의 영향을 받아 졸업후 동 대학의 YMCA 회원들에 의해 8년간의 지원을 약속받고 1890년 9월 30일에 내한한 의료선교사였다. 처음에는 게일과 함께 부산에서 사역하였지만 1892년 11월 동역자 게일과 함께 원산으로 이동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에서 3년간 의료 및 개척선교를 펼쳤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패배감과 번민에 사로잡혔다. "영적인 능력이 결핍"된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중에 있을 때 1903년 8월 24일 원산에서 있은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기도회에 참석한 그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섰다.
“나는 3년동안 남감리회가 강원도에 세운 교회에서 애써 일해 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국민일보, 믿음의 유산, 9. 대부흥운동)
그는 기도회와 주일 예배 시에 동료 선교사들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교만과 강퍅한 마음, 믿음 없음을 통렬히 자복하였다.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이전에 보아왔던 하디가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평안을 얻었고 그의 입술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기도회와 주일예배는 온통 통회자복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것은 통성기도가 한국교회의 특징중의 하나가 되는 시발점이었다. 이제 사람의 성(城)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城)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존 로스의 한글 선생이었던 양반출신 진천수라는 사람의 고백은 또 다른 예이다. 그는 19세 때 수개월간 간질병을 앓던 그의 아내를 잃었는데, 그의 아내가 죽음과 사투하는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방탕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다가,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친구와 명절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죽은 아내를 저주하였다. 그런 그가 눈물을 흘리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믿음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윤승근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1901년 원산 부흥회를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20년 전 주전소(鑄錢所)에서 일할 때, 4달러의 임금을 초과하여 받은 것이 생각나 하디를 찾아와 4달러를 내놓고 그것을 탁지부에 되돌려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듯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죄의 회개"라는 개인적 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의 근원이 "나"에게 있다는 자각이 제2의 예루살렘을 이끌어 낸 것이다. 결코 무엇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무슨 신비한 체험을 위함도 아니었다. 단 하나 하나님 앞에 선 "나"의 "죄인 됨"을 인식하고 자복함으로서 거듭남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렇게 거듭난 이들이 영적인 죽음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죄의 은총을 통하여 참신앙의 사람들이 된 것이다. 실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는 입술의 고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마음의 통회와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이용구저, 평양대부흥운동, 생명의 말씀사)
위의 글은 엊그제 서울기도모임에서 정원장님이 읽어주신 내용이다. 울 영성학교도 문을 연지 3년 반이 훌쩍 지났으며, 백여 명의 공동체 식구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수많은 기적과 병 고침과 능력과 이적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성령의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소수이다. 그래서 목하 고민 중이다. 그 이유는 쉬지 않고 기도의 습관을 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에 대한 심각한 인지가 없기에 철저한 회개가 없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현행법을 위반했거나 사회적인 통념상 비도덕적인 말과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죄는,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 큰 죄는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죄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완벽하심처럼 완벽해야 하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다. 또한 모든 우상에서 멀리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인들이 가장 많이 섬기는 우상이 바로 자기 자신과 돈이다. 그래서 성경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고 콕 집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며 의인은 한명도 없다고 밝히는 이유이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하였기에 사람의 마음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유이다. 즉 죄로 변질된 자아가 죄의 온상이기에, 육체를 지닌 인간은 아무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육체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기에, 날마다 자신의 죄악을 통회자복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입어야한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영접기도와 주일성수를 반복하는 교인들에게, 과거에 고백한 회개로 모든 죄를 청산하였기에, 더 이상 죄에 대한 가르침이 없이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것에 몰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육체를 지닌 사람은 날마다 머리에서 떠오르는, 수백 수천 번의 죄악된 생각과 싸우고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잊고 있다. 이 본질적인 죄를 인지하고 싸우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도 성령의 내주를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위의 말은 앞에서 소개한 하디선교사님의 고백이다. 그는 백년전 구한말시대에 암울하고 미개한 우리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철저한 회개 없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신의 죄를 내놓고 통회하며 자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혈이 낭자한 선교사들의 복음을 전해들은 우리네 교회는, 영접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대신하며 무능하고 무기력한 믿음을 천국 가는 자격으로 믿고 있으니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울 영성학교 식구들이 쉬지 않는 기도의 습관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내주와 동행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날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와 싸우는 결연한 태도가 없기 때문임을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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