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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사람

Joyfule 2020. 3. 24. 00:22


 
    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사람



어느 날 아침 핸드폰 벨이 올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이다. 그래서 전화를 받으니, 삼성그룹 비서실이라고 한다. 그룹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일 아침 오전까지 정장차림으로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한다. 당신이 전화를 끊으면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삼성그룹 회장이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원한다면, 필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제안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만일 조선시대의 왕이 불러주었다면 대단한 벼슬을 내릴 것을 상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찾아갈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재벌 회장이 불러주었으니 계열사 사장 자리를 제안할지, 아니면 천문학적인 사업자금이 들어가는 일을 맡아 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인생일대의 최고의 기회가 찾아온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확률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룹회장은 당신이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이름조차 모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가능성이 높은 제안을 해드리겠다. 당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그 분이 바로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필자의 제안에, 잠시 기대감에 들떴다가 이내 실망스런 얼굴로 돌아가는 당신의 표정이 읽히고 있다. 왜 당신은 필자의 제안에 급 실망하는가? 평생 사는 동안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삼성그룹 회장이 불러주는 사람이 드물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찾는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은 평생 구경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애타게 찾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5:1)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0:20,21)

 

위의 구절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계시며, 찾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면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망당해서, 예루살렘성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한선지자로 유명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고 찾으면 용서하겠다고 제안하고 계시다. 결론적으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했다. 이사야는 이보다 경악스런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팔을 벌리며 기다렸지만 그들에게 실망해서, 급기야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조차 없으며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그렇다면 이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머지않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마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하나님이 애타게 찾던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기적과 이적이 드러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네 교회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을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영성학교가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성학교에는 하나님의 기대대로 성령의 사람들이 배출되고 있는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 사실이 필자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영성학교를 교회공동체로 삼아 눌러 앉은 이들은, 성령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는 습관을 들인 사람들이다. 기도하는 시간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타게 찾는 사람들의 조건인,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싶다.

 

1. 자발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33:7~11)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걸출한 지도자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명을 받아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했지만, 여호수아는 자신의 믿음을 검증받아야했다. 첫 번째가 바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의 역할이다. 가나안 7족속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사실적이었지만 부정적으로 대답한 8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갈렙과 함께 믿음의 보고를 했던 인물이다. 위의 구절은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에도, 여호수아는 회막에 남아서 하나님을 기다렸던 인물이다. 이 행위는 아무도 시킨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만날 확률이 있어서도 아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자발적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에 찾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성경에 또 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위의 구절은 어린 다윗이 전쟁의 베테랑이었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내뱉은 믿음의 말이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갖다 줄 음식을 가지고 전쟁터에 갔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골리앗의 외침을 듣게 된다. 그러자 정의감에 불타서 골리앗과의 싸움을 자청한 것이다. 이 싸움은 전쟁게임이 아니라 목숨을 내걸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방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 교회에는 3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시키면 마지못해서 의무적으로 하는 사람, 시켜도 하지 않는 불순종의 사람이다. 당신은 이 중에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자발적으로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애타게 찾는 사람이 될 수 없다.

 

2.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

 

축구선수라면 모름지기 축구하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학창시절부터 최소한의 공부만 마치면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방학에는 합숙훈련이나 시합이 예정되어 있어서 더 바쁘고 힘들다. 그렇게 초중고를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대학이나 프로구단에서 받아주는 선수들은 극소수이다. 나머지 선수들은 운동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아니, 학창시절 내내 축구에 올인한 선수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현실은 냉정하기 그지없다. 인생을 축구에 바쳤다고 해도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어디 축구선수만 그런가? 미술을 하거나 음악을 하는 이들도 그렇다. 어릴 적부터 번득이는 재능을 인정받아서 참가한 대회마다 상을 휩쓸고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탁월한 미술가나 음악가가 되는 것은 실로 어렵다. 그래서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의 반열에 오르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23)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이 그를 기쁘게 여기셔서 의인으로 여기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친구라는 호칭을 얻은 유일한 성경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만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다. 수십억 아니 수백억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얻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칭찬을 받았는지, 당신도 궁금하지 않으신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보여준 사건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과, 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렵사리 얻은 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최강의 믿음을 보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의 행위와 비교해보자.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수많은 믿음의 행위들을 하고 있다. 수많은 예배의식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갖가지 교회봉사로 파김치가 되도록 살아가도 있다. 목회자들은 아주 인생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평생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칭찬과 축복을 얻어 누리지 못하는가?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1,4)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성경도 없었고, 신학이론을 가르치는 신학교는 물론, 목회자가 이끌어주는 교회도 없었다. 어떤 행위들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을 들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자 왕인 것을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이끄시고 지켜주실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가 어떤 빈도와 강도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의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친구로 인정하시며 그의 인생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동행하는 삶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6:1~4)

 

위의 구절은 베드로가 어떤 태도와 심정으로 기도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 끝에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을 경험했다. 그리고 새롭게 기독교인인 된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기도를 가르쳐서 성령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시작한다. 그가 전심으로 행한 것은 교회를 치리하고 상담하며 전도하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기도하는 일고 말씀사역이었다. 말씀사역은 지금의 우리네 교회처럼 성경공부와 설교를 하는 게 아니다. 당시는 신약성경이 없던 시절이므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3년반동안 예수님께 들어왔던 이야기와 예수님의 행적을 종합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 외에는 성령과 교제하고 동행하기 위한 기도에 인생을 걸었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3.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절대 순종하려고 애쓰는 사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위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이며 철저하게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는가? 암울하고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하며, 어떤 환경과 낙심천만한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살고 있는가? 덧붙여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완벽하신 하나님처럼 말과 행동을 완벽하게 하며 살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자의 질문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살수 있냐면서, 자신들도 노력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로 항변할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우리가 마주한 차가운 현실이다. 부족하고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살 수도 없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봐주시겠는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1~3)

 

위의 구절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요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초대교회의 7개 교회를 나열하시며 전한 말씀의 일부이다. 안타깝게도, 7개 교회 중에서 5개 교회가 책망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사데교회에 하신 책망이 위의 구절이다. 그들에게서 온전함을 찾지 못하였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게만 완전함을 요구하시며 심판 날에 이의 유무를 확인하시겠는가? 짐작하신대로, 심판대에 선 모든 영혼들에게 심판의 기준으로 확인하시는 내용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명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냐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투가 아닌가? 그러나 두렵고 떨리는 심판대에서, 추상같은 예수님 앞에서 그런 말이나 꺼낼 수 있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우리네 교인들은 성경에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서 그동안 교회 마당을 밟으면서 해온 신앙행위를 토대로,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온전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완벽하게 실행하며 살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토로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냐고 항변하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변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명령을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교인들이 설교단상에서 듣는 성경말씀은 전체 성경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축복과 덕담, 위로와 격려를 달달하게 포장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심판대에서, 설교시간에 전혀 듣지 못한 말이라고 항변하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3~26)

 

위의 말씀은 부자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는 예수님을 명령을 거절하고 떠나자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하다고 대답하시고 계시다.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하 답변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5:10)

 

우리를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전심으로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서,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세 가지가 하나님이 애타게 찾는 사람의 조건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라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다. 영성학교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조건이 부족하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이유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물론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완벽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어떤 명령이라고 절대 순종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이들이 누군가 살펴보시고 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계신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하나님이 애타게 찾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