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 일리아드 (liad) ★ 그리스 선단들 집결하다
사냥에서 돌아온 다음에서야, 메넬라오스 왕은 왕비가
트로이아 왕자와 함께 도망치고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담한 슬픔과 함께 열화 같은 분노를 느낀 그는
곧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트로이아 왕자의 잘못을 알리고
형인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검은 수염〉아가멤논은
그리스 모든 도시 국가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대왕이었다.
사자의 문이 있는 황금 시대 뮈케나이의 궁전에서 아가멤논은
모든 군사와 배를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퓔로스의 노왕 네스토르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들비둘기가 나직하게 울어대는 티스베에도 그 명령이 전해졌다.
험악한 땅의 우레 같은 고함소리로 유명한〈우레목〉디오데메스,
험한 바위섬 이타카를 다스리는 꾀주머니 왕 오뒤세우스,
심지어는 크레타 섬의 이도메네오스에게까지 명령이 전해졌다.
크레타에서, 아르고스에서, 이타카에서, 본토와 섬에서
검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도시 국가의 왕들은 농사를 짓고 있던 부하,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부하들을 불러들여 활과 창으로 무장하게 했다.
병사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루 속히〈예쁜 뺨〉헬레네를 되찾고,
그녀를 꾀어낸 왕자의 죄를 물어 트로이아에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항구에서 자신의 배에 탄 채 선단이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배가 모두 집결하자,
아가멤논은 마침내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단에는 마땅히 합류했어야 할 장군이 하나 빠져있었다.
그 일의 내력은 이렇다. 파리스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은빛 발〉이라 불리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펠레우스 왕의 아들을 낳았다.
펠레우스 왕과 테티스 왕비는 이 아들의 이름을 아킬레우스라고 지었다.
신들은 왕비 테티스에게 만일 아킬레우스의 몸을
저승 세계를 흐르는 강 가운데 하나인 스튁스 강물에다 담그면,
그 거룩한 물의 영험으로 전쟁터에서도
죽지 않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테티스는 기꺼이 신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아들을 머리부터 그 검고 쓰디쓴 강물에 담그자니
발목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티스의 손이 닿은 아킬레우스의 발목만은
그 스튁스 강물에 적셔지지 않았다.
테티스가 그것을 깨달은 건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스튁스 강물에 담그기는 한 번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티스는 이 일이 있는 후부터 늘 아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소년이 되자 아버지 펠레우스는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파트로클로스를 친구로 딸려 아들을 테살리아의 케이론에세 보냈다.
케이론은 가슴 위쪽은 사람이고 아래쪽은 말인 켄타우로스이며,
그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켄타우로스였다.
케이론은 아킬레우스를 다른 소년들과 합류하게 하고,
말 타는 법(케이론 자신의 등이 곧 말 잔등이었다),
칼과 창과 활 쓰는 법, 하프 켜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케이론은 이러한 것들을 다 가르친 다음에야 아킬레우스를
아버지 펠레우스의 궁전으로 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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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가멤논의 소집 명령이 떨어지고 검은 선단이 발진하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퀴로스 섬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섬의 뤼코메데스 왕에게, 자기 아들에게 처녀 옷을 입혀
그 섬나라 공주들 사이에다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킬레우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에
고분고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테티스는 오로지 아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느라고
무슨 마법을 걸지 않았나 싶다.
배가 집결할 동안 아킬레우스는 뤼코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아들은 보호하기 위해 꾸민
테티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단이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던 도중, 선단의 병사들이
마실 물을 싣기 의해 스퀴로스 섬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 섬에서는 아킬레우스 왕자가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뤼코메데스 왕은 군대의 상륙을 환영하면서도
아킬레우스 왕자 같은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면서 딱 잡아떼었다.
상륙 부대의 지휘관은 낙심천만이었다.
왜냐하면 점쟁이 우두머리 칼카스가 아킬레우스 없이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킬 수 없다고 예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공연히 꾀주머니 장군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염과 눈썹을 검게 물들이고 머리카락을 붉은 모자 속으로 감춘 다음
장사꾼 옷을 구해 입고 방물장수로 변장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커다란 봇짐을 짊어진 채
그는 뤼코메데스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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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smus II QUELLIN(1607-1678), Achilles among the Daughters of Lycomedes
궁전 앞마당에 방물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왕의 딸들이 우루루 몰려 나왔다.
아킬레우스도 처녀처럼 너울을 쓰고 그들 사이에 묻어 나와
방물장수의 봇짐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방물장수가 봇짐을 풀자 왕의 딸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금관을 집는 처녀, 호박색 목걸이를 집는 처녀,
하늘빛처럼 푸른 옥 목걸이를 집는 처녀,
붉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치마를 집는 처녀도 있었다.
처녀들이 모두 하나씩 집고 나니 방물장수의 봇짐은 곧 바닥이 났다.
봇짐의 맨 바닥에는 자루에 황금 징이 박힌 큼지막한 청동검이 하나 들어 있었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채 다른 처녀들이 물건을 다 고르고 돌아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듯한 마지막 처녀가 앞으로 걸어나와 그 칼을 집었다.
그런데 잡는 것부터가 아무리 보아도 그런 무기를 많이 다루어 본 솜씨였다.
예전에 익숙했던 솜씨로 칼을 잡는 순간,
어머니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걸었던 마법이 풀렸다.
아킬레우스 왕자는 너울을 풀어헤치면서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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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peo Batoni, Achilles at the Court of Lycomedes, 1745
그러자 선단의 왕들과 장군들이 달려와 아킬레우스 주위로 몰려들면서 좋아했다.
그들은 아킬레우스가 입고 있던 여자 옷을 벗기고,
전사에게 어울리는 짧은 킬트 치마와 소매 없는 외투로 갈아 입힌 다음
허리에는 칼까지 채워 주었다.
연합군 장군들의 부탁을 받은 아킬레우스는 아버지 펠레우스 왕의
궁전으로 되돌아가 선단에 합류할 군대와 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 테티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너를 안전한 곳에다 두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네 운명은 네가 선택해야 한다.
네가 여기에 머물면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를 따라간다면,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의 이야기에
네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의 명예를 얻을 수는 있으나
네 수염에 흰 올이 생길 때까지는 살지 못한다.
다시 아버지의 왕궁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 저는 오래 살지 못해도 명예로운 삶을 택하겠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손가락으로 칼을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아버지 펠레우스 왕은 아킬레우스에게 군대를 실은 배 오십 척과
친구 겸 전우로 파트로클로스까지 딸려 보냈다.
어머니는 울면서 아들의 몸에다 지아비 펠레우스의 갑옷을 입혀 누었다.
그것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펠레우스를 위해 손수 만들어 준 갑옷이었다.
마침내 아킬레우스는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아로 향하는 연합군 선단에 합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