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 일리아드 (liad) ★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
그리스 선단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다.
폭풍이 선단의 진로를 방해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나타난 적의 함대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연합군의 선단은 트로이아 성이 보이는 해안에 까지 이르렀다.
이 때부터 선단에서는 트로이아에
누가 먼저 상륙하는가를 두고 겨루기가 벌어졌다.
노잡이 들은 서로 먼저 상륙하고 싶었던 나머지 노젓는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뱃머리가 바다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이 겨루기에서 승리한 것은 프로테실라오스 왕자가 지휘하던 배였다.
그러나 왕자가 해변에 발을 딛는 순간,
트로이아 진영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왕자의 목줄기를 꿰뚫고 말았다.
왕자는 모래톱 위로 쓰러졌다.
이로써 프로테실라오스 왕자는 그리스 최초의 상륙자이자
기나긴 트로이아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나머지 그리스의 군사들은 그의 뒤를 이어 트로이아 군을 휘몰아쳤다.
트로이아 군은 잘 훈련 된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다. 그리스 군사들은 해가 떨어졌을 때도
해변의 모래 언덕, 트로이아 평원의 갈대밭, 거친 들풀 위에다
재빨리 잠자리를 마련할 줄 아는 선수들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배를 해안에 끌어다 붙이고,
배 앞에서 집회장도 만들고 오두막도 얽어 놓았다.
트로이아 해변의 삽시간에 작은 항구 도시 비슷한 마을로 변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이 계속되는 몇 해 동안
뗏장과 목재로 얽어 세운 그 마을에 살면서 긴 싸움을 치뤄 내었다.
아홉 번이나 야생 편도나무가 꽃을 피웠고, 아홉 번이나
트로이아 성 밑의 가파른 바위 사이로 돋은 떨기나무 가지를 말렸다.
배의 재료로 쓰였던 나무들이 썩어갔고 조국을 떠나올 때
병사들이 지니고 있던 그 뜨거운 야망도 점차 무디어져 갔다.
그리스 연합군은 포위 공격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성 주위에다 참호를 팔 줄도 몰랐고 트로이아 동맹국의
보급품과 군대가 지나는 길목을 지킬 줄도 몰랐다.
그들은 또한 성문을 부술 줄도,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늙은 왕과 늙은 신하들이 지휘하고 있던 트로이아 군대 역시 성 안에서만
죽치고 있다가 이따금씩 성문을 열고 나가 작은 접전을 벌일 뿐이었다.
트로이아 군대의 지휘관 중에서 시도 때도 없이 성문을 열고 나가
그리스 진영을 짓밟는 장군은, 트로이아 군의 사령관이자
왕의 맏아들인 헥토르뿐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아 주위의 작은 해안 도시들은
그리스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검은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넌 그리스 연합군은
이런 작은 해안도시들을 급습하여, 가축은 양식으로 삼고
말은 전차를 끌게 했으며 여자들은 잡아서 노예로 삼았다.
편도나무가 열 번째로 꽃을 피울 즈음, 이런 해안 지방의 소도시를 기습한
그리스 연합군은 아름다운 그 두 처녀를 포로로 잡아왔다.
전쟁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크뤼세이스와 브리세이스가 바로 그 두 처녀였다.
크뤼세이스는 전리품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는 대왕
아가멤논에게 주어졌고, 브리세이스는 그 기습 공격을 지휘했던
아킬레우스에게 상으로 주어졌다.
Jacques-Louis David, The Anger of Achilles 1819
태양신 아폴론을 섬기는 사제였던 크뤼세이스의 아버지는
그리스 진영으로 와서 몸값으로 금을 낼 터이니 딸을 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이를 거절하고 노인을 잔뜩 욕보이고는 돌려보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직후에 그리스 진영에는 열병이 돌았다.
많은 병사들이 열병으로 죽었고,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밤이고 낮이고 해변에 자옥했다.
절망에 빠진 그리스 연합군은 점쟁이 칼카스에게
열병이 퍼진 원인을 알아보게 했다.
그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관찰하고 모래판에다 그려가며 점을 쳤다.
칼카스는 태양신 아폴론이 사제가 당한 모욕을 대신 분풀이해주느라고
은으로 만들어진 활로 연합군 진영에다 열병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크뤼세이스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지 않는 한
아폴론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아가멤논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장군들은 그에게 처녀를 돌려 보내자고 말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진
브리세이스를 차지하게 해준다면 크뤼세이스를 돌려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 즈음 아킬레우스는 이미 브리세이스에게 정이 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보호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브리세이스를 위해서라면 칼을 뽑는 것도 사양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아프로디테가 파리스와 트로이아를 편드는 것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편을 들기로 작정하고 있던 아테나 여신은,
아킬레우스의 마음 속에 대왕과 맞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자기가 대왕과 맞서는 순간
전쟁은 연합군의 패배로 끝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장군 네스트로가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이는 젊지만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 중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성질이 급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 대왕을 가리켜
얼굴은 마치 개와 같고 가슴은 겁쟁이 사슴같을 뿐아니라
욕심 많은 비겁자라고 욕했다.
"대왕은 전투에서는 별 활약도 하지 않으면서 전투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한 전리품까지도 차지하려고 합니다.
전리품뿐만 아니라 명예까지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대왕에게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아가멤논의 표정은 비구름이라도 낀 듯이 어두워지면서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대왕이다. 네 말마따나 나에게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다.
이것을 잊어 버려선 안 된다.
너는 또한 대왕으로서 그럴 만한 권리도 가지고 있다.
너는 많은 왕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라."
두 사람의 싸움은 나날이 험악해져 갔다.
다른 장군들로서는 그 싸움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막말을 한 사람은 아킬레우스였다.
"아가멤논 장군. 당신은 내 명예를 더럽혔소.
따라서 신들 앞에서 맹세하거니와 더 이상 당신을 위해서 싸울 수 없소.
나는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트로이아를 상대로 싸우는 싸움에서는
어떠한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오."
아킬레우스는 회의장을 뛰쳐나가 자기 부대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로는 자기 부대, 자기 나라의 검은 선단 밖으로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지휘를 받던 군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가멤논은 불같이 오르는 화를 삭이면서 아폴론 신에게 제물로 받칠
집짐승과 함께 크뤼세이스를 자기 배에 싣게 했다.
그리고 오뒤세우스에게 명령을 내려 처녀를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도록 했다.
배가 떠나자 아가멤논은 부하를 보내어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있던
브리세우스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오게 했다.
처녀가 울면서 아가멤논의 부하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지만
아킬레우스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저 선 채로 가만히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처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킬레우스는
차가운 바닷가로 달려가 모래톱에 주저앉아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다.
바다 밑 수정궁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통곡소리를 들은
바다의 여신 <은빛 발>테티스는,
바다위를 오르는 바다 안개처럼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테티스의 모습은 아들의 눈에만 보였다.
테티스는 아들 옆에 앉아 머리카락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Thetis Consoling Achilles
"왜 이렇게 슬퍼하느냐?
네 가슴에 맺힌 슬픔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 보아라."
아킬레우스는 울먹이면서 자신이 통곡하고 있는 사연을 말했다.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는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신들의 아버지인 벼락의 신 제우스에게 탄원해서
트로이아가 한번만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트로이아가 이기게 되면 아가멤논은 자기 휘하 장국 중의 하나인
아킬레우스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뒤 되돌아와 달라고 애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테티스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우스에게 탄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들의 아버지가 다른 일로 세계의 반대쪽 끝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테티스와 아킬레우스는 제우스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아킬레우스는 열이틀 동안이나 자기 배에서 기다리면서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에 오뒤세우스는 격식에 맞는 제물과 기도문,
죄를 닦는 데 필요한 제사용구들과 함께 크뤼세이스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고 해변으로 돌아와 있었다.
크뤼세이스의 아버지는 아폴론 신에 의한 열병의 저주는 이미 풀렸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연합군에 생기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아가멤논 대왕의 진영에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배 안에서 가슴 속에 사무친,
장미 송이처럼 붉은 분노를 다독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