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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국의 의(義)

Joyfule 2019. 11. 22. 15:53

 

       6.천국의 의(義)

 

 

천국의 의에 대한 중요성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찾을 수 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밝혀 주며 미래의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지배,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대해 살펴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다.서기관들은 종교에 대한 전문 연구가들이었다. 마치 신학대학 교수와 같이 성경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연구 주제는 의에 대한 정의(定義)였다. 바리새인들은 이 서기관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로서 그 연구된 의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의의 성취였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서기관들은 선악에 대한 대단히 광범위한 율법체제를 개발했고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쏟아 부었다. 예를 들면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태 복음 5장 21절 이하를 보면 그들의 법보다 더 나은 법들을 주께서 말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먼저 화의 법이 있다(the Law of Anger).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구약의 법으로서 현재에도 유효한 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를 개역(R.S.V.) 성경에서는 "노(怒)는 죄이다."(Anger is sin)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화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즉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다. "라가"는 히브리인의 욕설로 "골빈 녀석"(empty head)이라는 뜻이다. "라가", 미련한 놈이라는 욕설은 일종의 강한 화의 표현이다. 이 세상에 욕 한번 안해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화는 과연 살인만큼 나쁜 것이어서 "심판받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살인은 정말 죄이다." 그러나 "화도 역시 죄다."라는 것이다. 화가 치밀면 살인치는 않았을지라도 처음에는 욕을 퍼붓다가, 참지 못하면 주먹이 날아가고 그래서 성이 풀리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후려치고, 마침내 그 화가 폭발하게 되면 더 험악한 짓을 얼마든지 저지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죄가 있는 것이다. 화가 성숙하게 되면 살인이 되는 것이다(Murder is anger full-grown).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도 있지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서기관은 외적 행동을 강조하여 마음 속에 아무리 화를 품고 욕설을 퍼부어도 살인치만 않으면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은 참된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인 것이다. 마음에 화를 끓이고 있으면서 욕하며 죽이고 싶은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 이미 그는 죄인이며 "지옥 불에 들어갈" 만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단지 죄의 드러난 결과만을 보시지 않는다. 천국의 의는 "너희가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 말한다(What you are is more than what you do).


천국의 의는 형제들에 대하여 마음 속에 악의를 전혀 품지말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주셔야만 우리는 그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의 의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성취되는 것이다. 천국에 장차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셔야만 한다.


다음으로, 순결의 법(the Law of Purity)이 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서기관의 율법은 불법적인 성관계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보다 더 높은 수준을 말씀하고 있다. 즉, 천국의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율법에 간음은 분명히 죄다. 예수님은 마음에 육욕을 품는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태 복음 5장 28절 앞에 감히 정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마도 이 말씀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 간음죄 뿐만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목적, 중심 사상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살피고 계신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온다. 선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다. 다른 중이 비난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천국의 의, 성적 순결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계속하여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산상수훈의 요구하는 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남아 있을 눈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설사 눈을 빼버렸다고 하여 근본적으로 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간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지 눈에 있는 것이 아니다.같은 내용의 30절 말씀을 보자.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문제의 손을 찍어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찾아 필요하다면 어떤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다.만약 문제 해결을 위해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려서 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라. 그래서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멸망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국이 요구하는 이 높은 수준의 의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겠는가? 순결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국의 능력,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생활이다. "삶의 영"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능히 천국의 의를 이룰 수 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보자.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날 결혼과 이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들 편리한대로(casual matters)이루어지고 있다.이같은 비성서적인 결혼 표준이 거의 전 문화에 파고 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혼에 대한 단 한 가지 근거만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남편이든 아내이든 어느 한 편이 '음행한 연고 없이는' 결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레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구약 시대에 간음죄는 사형이다. 그래서 신약은 간음한 자를 죽은 자로 간주하여 이혼하고 다시 결혼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다른 사람과 결혼할 목적으로 이혼하는 것은 분명 죄다.왜냐하면 그 경우는 음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정직의 법(the Law of Honesty)이 있다.


"(마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유대인들은 맹세에 사용되는 대상물이 어느 정도 거룩하느냐에 따라서만 맹세는 구속력을 지닐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기관 전통에 따르면 그 대상물이 별로 거룩치 못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정직의 윤리를 모욕하는 처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아시고 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신뢰받을 수 없을 만큼 꼭 맹세해야 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죄라는 것이다. 천국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 그대로가 진실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나의 말 그대로 나의 맹세가 되게 하자' 말이나 마음, 그리고 글이나 약속들을 우리 이웃들이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생활하자. 이것이 바로 정직의 법이다. 오늘날 불신 사회에서 천국의 의가 되는 정직의 법을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삶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랑의 법(the Law of Love)이 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사악한 시대에 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업이나 국제 정치 사회에 적용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살피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 상태와 중심인 것이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마음의 의인 것이다.


영감받은 사도 바울은 법과 질서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요한 복음 18장 19절-23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돌려대지 않고 오히려 23절과 같이 책망했다.


"(요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요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요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요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요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주께서 원하시는 바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전혀 복수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에 대해 사랑에 동기된 마음을 지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원수에게까지 넓혀가라는 말씀이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이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든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인가?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의이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이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떻게 역사(役事)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사랑의 다른 일면을 살펴보자.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여기서 보면 사랑은 정의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거룩한 진노'임을 알 수 있다. 그저 감상적인 호의를 베푸는 것은 참 사랑이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다.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의이다.


이 사랑의 법의 최고 표현이 용서이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사랑으로 행할 때만이 진정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용서는 완전한 용서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같은 용서가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God's Perfect Forgiveness)가 필요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다음 구절을 보자.


"(마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


"일흔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이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를 베풀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이 요구하는 용서의 내용을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


여기 일만 달란트란 금액은 당시 종들이 평생 벌어서 갚아도,처자식을 다 팔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인데 거저 탕감받았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자.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그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겨우 하루 품삯밖에 되지 않는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기 동관을 용서치 않았다. 그러자


"(마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요한 결론의 말씀을 하셨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상의 비유에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형제에 대한 용서에 선행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형제를 용서했을 경우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용서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천국의 의는 완전한 순결성, 완전한 정직, 완전한 사랑, 완전한 용서 등이다. 누가 이런 수준의 의로운 생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 때만이 진정 천국이 요구하는 수준의 용서를 베풀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 생활 속에서 경험할 때 천국의 의는 가능한 것이다. 이 하나님 통치 경험의 시작이 중생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때 중생의 기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은 새 삶을 창조한다. 새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이 악한 세대에서 부분적이나마 확실한 천국의 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천국의 의는 천국 생명에 대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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