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206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묵호역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묵호역 묵호역은 아직도 오래된 시골 역의 모습이 남아있다. 뾰족한 기와지붕만 평평한 콘크리트로 바뀌었다고 할까. 사람들의 발길에 닳은 콘크리트 바닥도 천천히 돌아가는 대형선풍기도 정겹다.​황혼 무렵 나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아내를 마중하러 삼십분쯤 먼저 역사로 나왔다. 시간의 흐름이 느린 듯한 시골 역사의 정감을 맛보며 그 구석의 의자에 앉아있기 위해서였다. ​묵호역은 기차가 도착하고 출발하는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한적하고 적막했다. 구석의 창구 안에 여직원 한 명이 앉아있다.​갑자기 내 기억의 오지에 붙어 있던 단편소설 ‘사평역’의 장면이 살며시 피어오른다. 시골역의 늙은 역장이 손을 부비며 창가로 다가가 무심히 내려 쌓이는 함박눈을 보는 장면이다. 역사 안에는 톱밥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길고양이와 강아지 세 마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길고양이와 강아지 세 마리 어둠이 짙은 산자락의 굽은 길을 돌아서 실버타운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길고양이가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동시에 의연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고양이는 인간에게 귀여움을 받고 잘 먹고 잘사는데 그 들고양이는 태어나서 혼자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한번은 가죽만 남은 바짝 마른 고양이를 봤다. 다음번에 만나면 먹을 걸 가져다 주려고 했는데 그 후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저녁 무렵 실버타운에서 바닷가로 가기 위해 차로 내려갈 때였다. 길가에 작은 강아지 세 마리가 나란히 서서 간절한 눈으로 내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마리가 종류가 다 달랐다. 이름은 모르지만 모두 고급종인 것 같았다. 주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수행방법으로서의 독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수행방법으로서의 독서 나는 종교적 수행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기도원도 여러 군데를 가보았다. 교회의 박스같은 기도방에 들어가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부흥회에 참석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성령을 보려고도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같이 기도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천주교에서 하는 묵주기도나 불교의 염불 기도가 좋아보였다. 짧은 음절을 만트라로 해서 반복하면 마음속에 공명이 온다는 방법이었다. 이해는 되는데 시간낭비일 거리는 회의가 들었다. 참선이나 명상을 권유받기도 했다. 자신의 호흡을 의식하며 모든 상념을 버리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정지하고 진공상태 속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장난꾸러기 원숭이가 이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훈장 받은 노인의 공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훈장 받은 노인의 공허 검은 밤바다가 넓게 드러누워 있었다. 허공에 뜬 붉은 달이 바다 위에 긴 빛의 띠를 이루고 있다. 파도가 몰려와서 물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밤바다에서 실버타운에 묵는 팔십대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노인은 평생 군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몸을 혹사해서 그런지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이십대 월남에 파병되어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했다. 내가 그때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침묵했다가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해병대 소위였는데 우리 중대는 정규 월맹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목을 지키고 있었어요. 새벽 네시에 정규군 복장을 한 월맹군이 개미떼같이 몰려오는 거야. 우리는 소수의 중대병력이었는데 적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혼자 즐기다 집에서 혼자 죽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혼자 즐기다 집에서 혼자 죽기 실버타운은 인생의 썰물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실습장 같다. 엊그제 같은 층에 있는 노부부중 부인이 죽었다. 남편은 혼자가 됐다. 윗층의 그림 그리던 부인도 죽고 남편 혼자 남았다. 연기같이 물거품같이 스러지는 생명을 실감한다. 죽은 분이 그렸던 동양화가 실버타운의 벽에 쓸쓸하게 걸려있다. 인간은 누구나 결국에는 혼자가 되는 것 같다. 파킨슨병에 걸린 혼자 사는 노인이 있다. 몇 번 혼자 쓰러져 있는 걸 직원들이 발견했다. 노인들은 요양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것 같다. 뼈만 앙상하게 남도록 목숨만 붙여놓는 그곳은 지옥이라는 인식이다. 주렁주렁 링거와 호흡줄을 달고 연명하는 중환자실도 무서워한다.​혼자 죽을 용기만 있다면 집에서 혼자 죽는 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벌거벗은 성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벌거벗은 성자 종교적인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조금은 슬픈 눈을 가진 그리고 얼굴에 미묘한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그녀가 그랬다. 그녀는 초등학교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면 근처의 법당에 자주 들렸다고 했다. 향냄새가 좋았다. 막연히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 있는 게 좋았다.​가난한 집 딸인 그녀는 중학교를 다니다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공장에 들어간 오빠도 그랬다. 공허한 마음에 어딘가 그들의 마음을 잡아줄 존재를 그리워했다. 그 무렵 오빠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정말 믿고 따를 만한 의인이 있어. 그분의 말씀을 한번 들어봐라. 정말 감동을 받을거야.”​오빠가 의인이라고 한 사람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컴맹탈출의 달팽이 기법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컴맹탈출의 달팽이 기법 나는 요즈음 컴맹을 탈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혼자 공부하려니까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앞에 앉으면 바로 속에서 주먹 같은 화가 치솟아 오른다. ‘로그인’이라는 빗장에 걸려서 들어갈 수가 없다. 한번 빗장이 풀려서 환호를 하고 다시 가려고 할 때 또 빗장이 걸린다. 비밀번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걸 되찾은 방법이 제시되면 그걸 따라가다가 또 길을 잃는다. 스마트 폰을 집어 던져 버린다. 앱을 실행하려고 해도 도중에 뭐라고 잔소리가 나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손녀도 능숙하고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못한다. 거의 장애 수준이다. 그래도 그걸 익히지 않으면 기차표를 살 수도 택시를 탈 수도 없다. 음식점을 예약하거나 주문할 수도 없다.​어제는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느림과 비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느림과 비움 나는 요즈음 다큐멘터리를 많이 본다. 산책할 때면 유튜브에 나오는 강연들을 듣기도 한다. 혼자 살면서 세상과 접속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따금씩 그 속의 말 한마디에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어제는 마흔 살에 출가해서 혼자 암자에 사는 스님의 일상을 보았다. 남은 인생을 수행자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출가했다고 말한다. 그 말이 연한 색깔로 내 마음을 물들였다. 그는 행복의 조건을 하나 잡은 것 같았다. 그동안 세상에서의 고통은 이미 그를 조각한 수행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화면에 비치는 암자로 오르는 오솔길에는 띄엄띄엄 넓적한 디딤돌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매일 가는 길에 근처의 돌을 하나씩 줏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옆방 노인의 죽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옆방 노인의 죽음 실버타운의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던 부인이 내게 말했다.​“그저께 한밤중에 사백십삼호에서 잠깐만 와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가서 보니까 할아버지가 옆에 있던 할머니가 죽은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저녁을 좀 많이 먹었는데 토하더니 그렇게 됐대요.”​노부부가 실버타운에 와서 일주일 정도 되자 한 사람이 죽었다. 그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으로 온 부부였어요. 내가 좀 친절하게 해드렸어요. 소화가 안된다고 해서 죽을 해다 드렸었거든요. 고맙다고 하면서 선물을 주면 안되겠냐고 하면서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팔찌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건 너무 과하다고 했죠. 그 부인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의 일이예요. 그 부인은 이 실버타운으로 오기 전에 부산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 속에 들어있는 ‘거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 속에 들어있는 ‘거지’ 어젯밤 유튜브를 보다가 ‘거지 근성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라는 짧은 내용이 담긴 영상을 보았다. 일상생활에서 공짜에 익숙한 사람들을 얘기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내 속에 들어있는 거지를 살펴보았다. 어린시절부터 평생 틀어박혀 있는 것 같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 부잣집 아이를 사귀어 얻어먹으면 그냥 좋았다. 그들의 놀이에 참여하면 재미있었다. 갚을 줄을 몰랐다. 물론 능력도 없었지만. 대학 시절 장학금에 목매달았다.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 벌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부자가 기부한 돈을 아무런 댓가도 없이 바랬다. 내 속에 들어있는 거지는 뻔뻔스러웠다.​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관계가 형성됐다. 나를 호의적으로 봐 준 장군들이 있었다. 우연히 친하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자잘한 즐거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자잘한 즐거움 실버타운에 이년 째 있으면서 노인들이 살아가는 속내를 본다. 황혼에 남은 여백을 칠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매일 바닷가 잔디밭에 모여 파크골프를 많이 친다. 색소폰이나 피아노를 배우는 노인도 있다. 여기 와서 알게 된 나이 팔십의 노인은 주민센터에 가서 하모니카를 배웠다. 이번에는 동해시의 평생교육관으로 가서 목공반과 볼링반에 등록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부지런한 성격이다. 산에서 나뭇가지들을 가져다 칼로깍아 여러 개의 지팡이를 만들었다. 그걸 다른 노인들에게 주려다가 거절당하자 도로 산에 가져다 버렸다고 했다. 그 노인은 인생 마지막으로 산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젊어서부터 산을 무척 좋아했다고 했다. 경동맥이 구십퍼센트 이상 막혔는데 산에 오르는 게 가능할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좋은 돈을 많이 모읍시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좋은 돈을 많이 모읍시다 오래전 터론토에서 아이들을 유학시키고 있는 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남편은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이자 군의관 시절 장군 계급장을 단 의무사령관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옷차림은 소박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남편이 받아오는 월급 만으로 생활을 할 땐 밥 짓고 청소하는게 여자 일의 다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아이들 유학 뒷바라지를 와서 스시집에서 알바를 하기도 하고 틈틈이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 보니까 돈의 개념이 달라졌어요. 공장에서 제가 하는 일이 씨디를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고 테이프를 붙이는 단순 작업인데 시간당 6불을 받았어요. 칩을 조립하는 기술만 있으면 좀 더 받을텐데 아쉬웠죠. 간단한 수작업..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부부간의 ‘불간섭 평화 협정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부부간의 ‘불간섭 평화 협정서’ 실버타운 안에서 내게 삼겹살과 소주를 사겠다는 노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나이가 팔십이고 부인은 몇 살 어리다고 했다. 지금도 부부싸움을 하는데 변호사니까 얘기를 들어보고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편안히 살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했다. 노 부부는 이혼을 하겠다고 시골지서를 갔다고 했다. 그곳 순경이 법무사를 찾아가라고 해서 법무사 사무실을 갔더니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 그냥 사시다가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노부부와 함께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를 놓고 사적인 조정재판을 시작했다. 먼저 남편 노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애들 교육시키고 결혼시켜 내보낼 때까지 같이 오십년을 살았어도 직장에서 바쁘고 하니까 아내가 어떤사람인지 몰랐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 사는 것 처럼 사는 비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 사는 것 처럼 사는 비결 나는 자존감을 가지고 인생을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사는 것 같이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건 돈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돈이라는 낚시 미끼에 아가미가 꿰면 한없이 비굴하게 되는 것이다. 사업가들을 단골손님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지압사를 알고 있다. 그가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검사들은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는 업자들의 속이 어떤지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업자들을 스폰서라고 하면서 돈줄로 알고 있죠. 업자들이 접근해서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진짜로 믿는 것 같아요. 때가 되면 검사 부인이나 아이들 생일까지 챙겨 비싼 선물을 사주고 돈 주고 입에 혀같이 노니까 그런가 봐요. 그런 검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은 길게 살아봐야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은 길게 살아봐야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다. 공무원 시험준비를 해왔다는 청년의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하다. 생활비가 없어서 더 이상 고시원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흐린 저녁 들길에 혼자 있는 사람같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 같다. 서글픈 얼굴에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또다른 고시원의 작은 방이 나타나고 벽에 걸린 모자에 육군대위 계급장이 반짝거린다. 장교로 제대하고 칠년째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 왔는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교원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여성의 얼굴이 나온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괴로움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좌절하고 끼니를 때울 돈이 없는 청년들에게 그곳에서 무료로 밥을 해주는 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