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207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중간 정도의 삶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중간 정도의 삶 동해의 바닷가로 내려와 살면서 자주 들리는 음식점이 있다. 막국수와 육계장을 잘하는 집이다. 도시에 살던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오전 열시반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 세 시경이면 문을 닫는다. 음식 맛이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몰려오는 데도 그 젊은 부부는 돈을 포기하고 자기들의 삶을 즐기는 것 같다. 그 부부만 그런게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이름난 탕수육집도 그렇고 책방도 그랬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논다. 집세를 내지 못할 만큼 쪼들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돈을 따라가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집은 너무 좋지도 않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다. 입은 옷은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유행을 따른 새것도 아니다. 그들 중..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어리석은 판사 고마운 판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어리석은 판사 고마운 판사 요즈음 ‘동네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주변의 소소한 일들을 맡아 직접 처리한다. 사무실도 없다. 직원도 없다. 칠십 노인이 직접 모든 일을 한다. 그는 법원장이었다. 대형 로펌의 대표도 했었다. 그가 ‘동네 변호사’가 된 건 노년의 겸손과 봉사의 모습이었다. 서울에 올라간 길에 그를 만났더니 대뜸 이런 하소연을 했다. ​“어쩌다 법정에 나가 봤더니 젊은 판사의 태도가 가관인거야. 사람들에게 온통 호통을 치고 변호사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천방지축인 거야. 내 경력을 대충 눈치챘을텐데 나한테도 그러더라구.”​그도 임자를 만나 당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라는 목적을 성취하면 그런 식으로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걸 견뎌 내야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무대의 배역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무대의 배역 육십세의 현역 직장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퇴직 후의 앞날을 생각하는 글을 보낸 분이 있다. 그 글을 보면서 직장이란 우리가 잠시 배역을 맡은 인생의 무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정년퇴직으로 한 배역이 끝나고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진다. 삼십년 가까이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정년 퇴직을 한 대학 동기가 있다. 퇴직을 하고 그는 공부를 해서 법무사가 됐다. 그는 칠십대 중반인 지금까지 백팩을 메고 전국의 등기소를 돌아다닌다. 돈까지 벌면서 걷고 또 걷는 운동을 하니까 좋다고 했다. 다니던 회사라는 무대에서는 퇴장을 했지만 인간인 그의 은퇴는 없는 것 같다. ​기자 출신의 고교 동창 한 사람은 퇴직 후 국어교사 자격증을 따고 우즈베키스탄에 한국어 교사로 가서 칠십이 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6급 공무원의 댓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6급 공무원의 댓글 6급 공무원이라고 신분과 이름을 밝히면서 글을 보내주신 분이 있었다. 짧은 글 속에서 건전한 삶에 대한 자세와 당당한 직업관을 엿본 느낌이었다. 나도 몇몇 공직생활을 경험했다. 사십여년전 나는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최전방부대로 갔을 때였다. 대위라고 하면 7급 공무원쯤 된다는 생각이었다. 육사출신 대령인 참모장은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중령들을 다루는 태도가 이상했다. 반말에 하대에 마치 어른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한번은 그 참모장이 모이라고 한 회식에 참석했었다. 소주잔이 한 두번 돌아간 후 참모장이 혼잣말 같이 “대령으로 진급했더니 참 좋단말이야”라고 했다. 어린애 같이 좋아하는 순진성 같기도 했다.​“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맑은 사람, 흐린 사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맑은 사람, 흐린 사람 밤중의 실버타운은 적막하다. 창은 농도 짙은 어둠에 물들어 검은 거울이 된다. 거기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 책상 앞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가 시간의 벽을 두드리고 있다. 내가 나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갑자기 요란한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고요를 흔들어놓는다. 액정화면에 고등학교 시절 은사의 이름이 떴다.​“나야 바로 밑에 와 있어.”​선생님의 나이가 여든 여섯살쯤일 것이다. 제자의 소식이 궁금하면 직접 전화를 하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하는 성격이다. 서울의 내 집 밑에 와 있다는 것 같았다.​“선생님 저 지금 동해에 내려와 삽니다. 집에 없어요.”​내가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아니야, 지금 실버타운 아래 주차장에 와 있다구.”​나는 깜짝 놀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함경도 보따리 장사꾼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함경도 보따리 장사꾼 오십년 된 무덤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뼈 조각들이 흙속에 묻혀 있었다. 다리뼈와 발뼈를 찾았다. 평생 길을 걷던 할아버지를 받쳐 주던 중심축이었다. 갈비뼈를 찾고 머리뼈를 찾아 가지고 온 상자에 담았다. 나는 그 상자를 차의 뒷좌석에 싣고 할아버지에게 그동안 변화된 서울의 모습을 구경시켜 주었다. 할아버지의 혼령이 차창 밖의 번쩍이는 고층빌딩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 같은 환각이 들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분골한 후 작은 나무상자에 담아 나의 아파트로 모셔 왔다. 손자의 집에 얼마간 묵으면서 지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언덕 나무 아래서 할아버지와 이별할 예정이다. 오십년 동안 할아버지의 묘를 돌봤다. 내가 죽으면 할아버지의 묘는 잡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수행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수행처 류영모 선생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사업을 접고 북한산 자락에 집을 마련해 그곳에서 경전을 읽는 생활을 했다. 그는 매일의 명상을 일지 형식으로 적었다. 그게 책으로 나온 것이 ‘다석일지’다. 그는 매일 명상을 글로 쓰는 것이 기도라고 했다. 가을 계곡물 같이 맑은 그의 노년의 삶이 신선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었다. 천안의 풍산 공원 그가 잠들어 있는 묘지에 노란 치자꽃을 한 송이 바치고 나도 글쓰기를 기도로 삼았다.​노년을 어디서 지낼까 하다가 동해바닷가 한적한 실버타운으로 내려온 지도 이년이 되어 간다. 어느새 환경에 익숙해진 느낌이다. 불교에 한 나무 아래 사흘이상 있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장소에도 집착이 생긴다는 뜻 같다. ​글을 블로그에 올리다 보니 댓..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명작 노년 만들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명작 노년 만들기 중학교 삼학년인 손녀는 빈 시간이 거의 없다. 내가 보고 싶어 하니까 손녀는 학원 근처의 치킨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치킨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녀는 손에 수첩을 들고 거기 적힌 영어단어들을 외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의 중학시절이 겹쳐진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따뜻한 눈길로 말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거라. 일류가 안 되도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면 된다. 사람은 다 제 먹을 것 타고 났다.”​할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란 것일까. 인생의 전반부는 뭔가가 되고 싶었고 돈이 많았으면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사회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나를 맞추고 살았다. 삼십대 중반쯤 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죽음 대합실의 속살 이야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죽음 대합실의 속살 이야기 이 년째 되니까 깨끗한 천국 같은 실버타운의 은밀한 속살이 보인다. 어떤 노인은 실버타운은 저승을 가는 대합실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노인들의 모습들을 종종 봤다. 노년에 남은 게 시간밖에 없다고 말하던 할머니가 컴퓨터 포커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다가 그 옆 바닥에 쓰러져 저세상으로 갔다.​노부부가 저녁을 맛있게 먹고 가더니 새벽녘 영감님이 이웃 약사 출신 부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까 함께 잠들었던 늙은 아내가 시신이 되어 있다고. 앰블런스가 와서 조용히 그 할머니를 모셔갔다. 언제나 마지막 행진을 하는 것 같아 보이던 파킨슨병을 앓던 노인이 어느순간 그림자 같이 사라져 버렸다. 젊어서 이 나라의 넘버 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어른들의 병정놀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어른들의 병정놀이 꿈결에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나는 꿈 속에 있었다.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산 옆에 암자같은 집들이 있고 그 안에서 염불을 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꼭대기에 있는 염불암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어느 순간 잠이 깼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록불빛이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늦잠을 잔 일이 없는데 처음인 것 같았다. 이상했다. 꿈 속에서 나는 오십년전으로 돌아가 대학 일학년 여름에 갔던 팔공산꼭대기의 암자로 올라가고 있었다. 왜 뜬금없이 시간의 아스라한 저쪽에서 그 장면이 내게 다가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릇같이 스마트폰 화면의 최근 전화기록을 들여다 보았다. 낯선 전화번호가 보였다. 발신..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는 위선자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는 위선자다 나이가 지긋한 사무장이 변호사실로 들어와 내게 말했다.​“권투선수 출신이 나를 찾아와 두들겨 패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분노하면서 변호사님도 위선자라고 욕을 해요.”​나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일부는 이해할 것 같았다. 해고된 그가 내게 와서 복직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의뢰했었다. ​나는 그들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법정투쟁을 해서 이겼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동정이 지나쳤던 것 같다. 그는 나를 변호사가 아니라 사회운동가나 정이 든 형쯤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사무장이 그에게 변호사비를 청구하니까 그는 배신감을 느끼고 나를 위선자로 단정했다. ​사이비 종교단체의 교주로부터 피해를 받은 여성들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녀들의 뒤에는 이단과 싸우는 단체가 있었다. 그 단체의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아름다운 인생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아름다운 인생 조용한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텍사스에 산다는 분이었다. 내가 블로그에 올려 민들레씨 같이 날려 보내는 글을 보고 인생관과 가치관의 정립에 도움을 얻었다는 것이다. 글을 쓴 보람을 느끼게 하는 감사한 말이다.​나는 왜 매일 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풀을 뽑을까. 사람들과 마음과 마음이 교류하면서 영혼의 좋은 친구들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맑고 향기로운 글을 써보려고 노력한다. 천국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한 그런 글을 써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희망을 가진 것은 내가 그런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보고 천국을 소개하듯 나는 사십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지옥’을 보고 연옥도 봤다. 법정과 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마음 리모델링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마음 리모델링 노년을 혼자 방에서만 지내다가 요양원으로 옮겨 인생을 마감한 분이 있다. 목수이자 가죽세공기술도 가지고 있던 그가 헛되이 살다 가는게 안타까웠다. ​공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던 아는 사람이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집을 나가 노숙자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을지로 지하철역 입구에서 그를 보았다는 소식을 듣고 형이 찾아가자 그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외로움의 노예가 되고 절망 속에서 나태하고 게으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실패하거나 늙었다고 절망하지 말고 나도 뭔가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리모델링을 해서 새로운 나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실버타운의 식당에서 305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걷는 행복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걷는 행복 쨍쨍 내려 쬐는 뜨거운 햇빛 아래서 얼굴이 하얗게 바랜 그 노인은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입으로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부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 보면 발이 한 두걸음씩 떨어지곤 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그의 얼굴에서는 섬뜩한 삶의 의지가 엿보였다. ​매일 우면산의 산자락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내가 올라갈 때 마주치는 남자가 있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나무기둥 같은 그 다리를 끌면서도 그는 쉬지 않고 야산을 오르내렸다. 한번은 그가 산길 흙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 엎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일어서서 또 걸었다. 어떤 때는 얼굴에 넘어져서 생긴 푸른 멍자국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야산을..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행복한 청소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행복한 청소부 요즈음은 이따금씩 세상을 힘겹게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본다. 새벽 한시 반에 지하철역을 청소하는 육십대쯤의 여성이 보인다. 플랫폼 벽 아래 의자 주위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빗자루로 쓸어내 쓰레받기에 담는다. 수세식 변기를 세제로 닦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낸다. ​저런 여성들의 수고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악취없고 깨끗한 지하철역이 되는구나를 알았다. 노조가 파업할 동안 파리의 지하철역에 진동하는 지린내를 맡아본 적이 있다. 낙서가 가득하고 더러운 뉴욕의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화면 속의 그녀는 밤일이 끝난 후 혼자 사는 단칸 지하방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다. 잠시 후 그녀가 다른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화점의 종이 쇼핑백들이 방바닥에 가득 쌓여있다...